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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바로 위 기사에도 소개돼 있듯이 김수현 작가의 대본은 마치 하나의 완성된 소설처럼 꼼꼼하고 치밀하기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청춘의 덫>을 제작할 당시 드라마 대본이 나오기가 무섭게 동이 나서 드라마를 찍어야 할 제작진에게까지 대본이 다 돌아가지 않는 사태가 벌어졌다죠. 김수현 작가의 열렬한 팬이었던 제 친구는 이때 방송사에서 일하는 남자친구까지 동원해 그 유명한 김수현표 ‘오리지널’ 대본을 구해 보고자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다고 합니다. 화면 속에 등장하는 밀폐용기에 붙일 메모지의 반찬 이름까지 멸치조림, 콩조림, 연근조림, 우엉조림 등 대본에서 일일이 지정하는 (불투명한 용기 속 소품까지 메모지에 적힌 그 반찬과 일치할지 궁금하긴 합니다만) 치밀함과 권위를 지닌 김수현 작가지만 지난해 말 영화 <하녀>의 시나리오 수정을 둘러싼 논란에서는 그녀 역시 대본이 뜯겨나가고 뒤집히는 영화계의 관습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2면 기사에서 작가들이 말하듯 대본은 드라마나 영화를 구성하는 한 요소일 뿐 그 자체로 소설 같은 독립적 작품은 아닙니다. 연출자의 예술적 자율성이나 촬영 현장의 현실적 제약을 완전히 배제하고 작가의 창작성만을 고집한다면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김수현, 김은숙, 노희경 등 스타급 작가들만 줄줄이 읊어도 상당수인 드라마판에 비해 영화판에는 이렇다 할 시나리오 작가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 원인이 한두가지로 정리될 수는 없겠지만 시나리오 작가의 고유한 영역이라는 게 드라마에 비해 훨씬 더 모호하다는 이유도 없지 않을 듯합니다. 작가주의를 고수하는 예술영화뿐 아니라 상업 장르 영화에서도 전문 시나리오 작가의 역할은 크지 않습니다. 장르영화에서 이야기가 허술하다는 건 한국 영화의 고질병처럼 지적돼 왔습니다. 지난해 흥행 대박을 낸 <해운대>나 <국가대표>라 하더라도 볼거리를 제외한 이야기만 본다면 잘 짜인 티브이 드라마만큼 촘촘한 완성도가 있다고 보긴 힘들죠. 그래서 어떤 이들은 티브이 드라마를 작가의 예술, 영화를 감독의 예술이라고 말하지만 영화판에도 김수현이나 노희경 같은 작가가 탄생한다면 영화 볼 맛이 더 나지 않을까요? 김은형 〈esc〉 팀장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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