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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아나운서 출신 재벌가 며느리의 원정출산 논란을 보면서 궁금해졌습니다. “재벌은 돈도 많은데 그깟 유학비 좀 아끼겠다고 원정출산을 해?” 옆에 있던 친구가 말했죠. “바보야, 돈 때문에 그러냐? 전쟁이라도 나봐. 미국에서 당장 자국민부터 구출할 텐데 그때 당당하게 비행기 타고 미국으로 도망갈 수 있잖아.” 독자 여러분은 가장 두려운 재난이 무엇입니까? 이번주 표지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떤 재난이 가장 무서울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런데 기사에서 말한 재난 불감증인지 땅이 갈라지거나 물이 건물을 집어삼키는 따위의 그림이 도통 그려지지 않았어요. 오히려 고시원 방화살인사건 같은 ‘묻지마’ 범죄가 훨씬 더 무섭습니다. ‘끝장나기’는 마찬가지인데 왜 이런 게 더 무서울까 생각해보니 그 이유 중 하나는 ‘나만 죽기 억울해서’인 것 같습니다. 인류 절멸이라면 수긍하겠으나 나를 포함한 특정 인물들이나 특정 집단만 죽어야 한다면 진짜 억울할 것 같습니다. 무식한 평등주의라고 욕먹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영화 〈2012〉를 보고 나오면서 마음이 개운치 않았던 건 지구에 종말이 온다는 예언보다 특정한 어떤 사람들, 수백억원짜리 티켓을 구할 수 있는 사람들만 살아남게 된다는 결말이었습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라도 나면 잽싸게 피하기 위해 미국 여권을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영화 속에서 지진이나 쓰나미보다 일부 부류가 받는 특별혜택이 훨씬 더 리얼하게 느껴진 건 비단 저만의 피해의식일까요? 이런 피해의식 자체가 벌써 마음속의 재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해보면 요새 유난히 터지는 ‘묻지마’ 범죄도 이런 마음속 재난이 일으키는 현실의 재앙인 듯합니다. 일이 없거나 극심하게 궁핍하고 가족마저 해체된 사람들이 지니는 자포자기의 심정에는 혼자 나락에 떨어졌다는 억울함이 똬리를 틀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재난을 막지 못하는 사회는 무능합니다. 하지만 재난을 일으키는 사회라면 더 나쁩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어디쯤 있을까요. 김은형 〈esc〉 팀장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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