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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이번주 표지기사를 준비하면서 고나무 기자가 취재를 위해 구입했던 콘돔들을 내놨습니다. 취재와 촬영 용도는 다했으니 이제 콘돔 본연의 용도를 위해 필요한 만큼 가져가라는 이야기였죠. 모두 결혼 5년차 이상 또는 성생활이 부끄러울 것 없는 ‘농익은’ 성인들이건만 반응이 영 시큰둥했습니다. 술자리 야한 농담의 수준이 지나치게 유쾌한 팀 분위기를 감안하면 어쩐지 사생활을 드러내는 것 같아 부끄러워서 주춤했을 리도 없습니다. 어떤 피임법을 쓰느냐는 질문에 ‘피임법 좀 써봤으면 좋겠다’는 대답이 많았다던 2면 기사를 보면서 조금은 씁쓸하기도 한 웃음이 나왔습니다. 주변을 보면 “콘돔 유통기한이 10년은 돼야 하는 거 아니냐”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1년 안에 한 상자 다 쓰는 사람들은 특별히 꺼낼 이야기가 없어서 그런지 가끔 성생활 속내를 터놓는 지인들의 대부분이 본의 아니게 ‘금욕법’으로 피임을 실천하는 사람들뿐입니다. 그렇다고 부부 사이가 안 좋은 친구들인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3년 전 출산 이후 그야말로 정다운 오누이가 됐다는 한 친구는 가끔 남편과 오붓하게 술도 마시고 부부간의 대화도 끊이지 않는 화목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다만 딱 한 가지가 비어 있다는 것인데, 섹스리스, 부부의 위기 어쩌고 하는 기사들이 오히려 스트레스가 된다고 합니다. 잘 살고 있는 내가 비정상인가 싶어서라죠.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하는 부부들의 경우 뜻밖에 ‘애 만들 시간이 없다’는 하소연을 하는 사람들이 꽤 됩니다. 물론 옛 어른들 말씀대로 ‘옷깃만 스쳐도 아이가 생기는’ 시대였으면 좋겠지만 밥 먹다가 숟가락을 내던지고 침대로 돌진하는 야성적인 로맨티시즘은 케이블의 심야 드라마에만 존재할 뿐, 샤워를 하면서도 내일 회사에 제출해야 할 과제나 마감해야 하는 기획기사를 생각해야 하는 게 요새 맞벌이 부부들의 현실이니까요. 이렇게 서랍 속 콘돔 유통기한 넘기는 게 많은 부부들의 고민이라면 싱글 남녀들은 오늘도 서로의 눈치를 보며 적절한 타이밍을 찾기 위해 목하 연구중이랍니다. 아이러니죠? 김은형 〈esc〉 팀장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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