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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안여돼’를 아십니까. 안경+여드름+돼지. 오타쿠 이미지를 비꼴 때 종종 등장하는 용어지요. ‘안여돼’로 오해받을 위험을 불사하고 ‘덕후왕 선발대회’에 응모한 독자 여러분의 헌신과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심사하면서 배꼽 잡았습니다. 좋아하는 공연을 보기 위해 밤새우고 줄을 서다 발작 일으킨 사연, 항공 잡지 과월호를 사기 위해 영등포, 청량리, 용산 같은 ‘야리꾸리한’ 동네를 뒤지다가 친구들한테 변태로 찍히고 집에서 몽둥이찜질 당한 사연, 영어 단어 시험을 치는데 중세 아일랜드 글꼴로 답을 써냈다가 0점을 받은 사연, ‘뮤덕후’(뮤지컬 덕후)로 살며 돈 아끼고 시간 아끼느라 건강 버린 사연 등. 웃다가, 그만, 감동 먹었습니다.
100호 특집 대면 상담에서 임경선씨가 말한 대로 21세기 한국 사회는 “매뉴얼”의 사회입니다. 어떤 학교를 가야 하고,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고, 어떤 배우자를 만나야 하고, 어떻게 노는 게 멋있는지까지 단답형 정답이 나와 있습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야 할까요?’ 쏟아지는 고민 메일들은 매뉴얼 사회의 한 풍경입니다.
오타쿠는 사회가 던져놓은 매뉴얼을 뒤적거리지 않는 사람들이죠. 자기가 좋아하는 거 챙기느라 유행하는 거, 남들이 좋다는 거, 찾아다닐 시간도 돈도 없습니다. 어느 편이 더 행복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10년 뒤 인기 직업을 지금 알 수 없듯이 매뉴얼은 수시로 바뀝니다. 따라가느라 꽁지 빠지게 허덕이다 보면 ‘그 산이 아니라 저 산이야’ 메아리가 돌아오기도 하죠.
결국 이기는 건 매뉴얼에 말리지 않는 삶입니다. 유행이 바뀌고, 기준이 바뀌어도 즐거울 수 있다면 그게 남는 장사니까요. 딱딱하고 진지한 신문 매뉴얼에 딴죽 걸고 킥킥거렸던 〈esc〉가 100번이나 나왔습니다. 100호는 더 즐겁자고, 재미있자고 만들었습니다. 재미없다, 싱겁다 느끼시는 분, 버럭 화내주십시오. 점점 더 견적 안 나오게 우울해지는 세상, 보란 듯이 즐거워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김은형 〈esc〉 팀장 dmsgud@hani.co.kr
〈esc 100호 기념〉 만화가 이크종 ‘esc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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