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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최근 일본에서는 <리아충 선언>이라는 책이 날개 돋친 듯 팔렸다고 합니다. 오타쿠들을 위한 연애지침서로 ‘리아충’이란 ‘현실(리얼리티)에 충실’이라는 뜻의 인터넷 신조어라지요. 꽃미녀 만화 주인공과 사귀는 혼자만의 상상에서 벗어나 실제 생활에서 원만한 연애를 할 수 있도록 돕는 정보들을 실었답니다. 예를 들어 “티셔츠를 바지에 넣는 것은 하지 말라”는 구체적인 조언이나 “자신을 위해 빌어 주는 여자아이는 종교를 권유하는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는 친절한 설명 등등.
이 예문들이나 일본 드라마 <전차남>이 보여주듯이 오타쿠의 이미지는 오래전 지저분함, 편집증, 외톨이 같은 것에서 순진함, 귀여움, 코믹함으로 많이 순화됐습니다. 최근에는 그것을 넘어서 오타쿠적인 기질이 젊은 사람들의 앞서가는 트렌드로까지 격상되는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저만 해도 후배들과 대화하면서 내가 늙었다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들 때는 도무지 알아듣기 힘든 그들만의 용어를 남발하며 대단치도 않아 보이는 취미생활에 대한 열광적인 대화를 이어갈 때입니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방대하고 시시콜콜한 지식과 정보의 교류를 듣다 보면 어이가 없고 웃기기도 하지만, 밥 벌어 먹고 살면서 언제 그런 짓까지 하고 사냐? 감탄합니다. ‘싱글라이프’의 김도훈 기자처럼 ‘취미생활에 몰두하는 게 아니라 아예 생활과 직업을 취미화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면 감탄이 아니라 존경할 만합니다. 근대에 르네상스인이 있었다면 21세기에는 오타쿠가 있다고 할까요?
〈esc〉 100호 특집으로 어떤 기획을 할까 고민 고민 하다가 ‘덕후왕 선발대회’ 사연 공모전을 추진하게 된 이유입니다. 주어진 일만 하기도 바쁘고 고단한 생활에서도 나만의 즐거움을 위해서 기꺼이 밤을 새우고 휴가를 반납하고, 수입의 상당 부분을 과감히 투자하는 오타쿠들에 대한 존경심의 표시입니다. 과감하게 오타쿠 선언을 하십시오. 공짜 비행기 탈지 누가 압니까?
김은형 〈esc〉 팀장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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