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가족=결혼 부부와 미혼 자녀로 이뤄진 가구’
한국 사회 법과 제도 속 ‘정상가족’의 기준이다. 헌법에는 별도의 정의가 없지만, 2005년 개정된 민법(779조)은 ‘배우자, 직계혈족 및 형제자매’ ‘직계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직계혈족 및 배우자의 형제자매’를 가족으로 규정한다. 가족 규정이 ‘혼인과 혈연’이라는 틀에 갇힌 탓에, 위탁가정, 황혼 동거, 동성 커플 등 다양한 법외 가족들은 의료·주거·사회서비스에서 밀려나거나 ‘없는 존재’가 된다.
가족 범위를 규정한 민법 조항은 호주제 폐지의 부산물이다. 본래 1958년 만들어진 민법 조항은 ‘호주의 배우자, 혈족과 그 배우자 등’을 가족으로 규정했다. 애초 이 조항은 2005년 민법 개정으로 호주제가 폐지될 때 같이 없애기로 논의가 진행됐지만, ‘가족 해체 우려’를 이유로 내용을 바꿔 살아남았다. ‘호주’가 빠진 부분을 ‘혼인과 혈연’이 채운 셈이다.
민법 규정은 가족을 규율하는 다른 법들에 준용되면서 혼인·혈연을 벗어나는 형태의 가족들을 배타적으로 차별하고 제도에서 밀어내는 효과를 낳았다. 가령 은행·우체국·관공서·학교 등 각종 사회제도가 요구하는 ‘가족 증빙’부터 난관이다. 가족관계등록법은 혼인·혈연 중심의 가족 개념 틀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부모·배우자·자녀만을 가족으로 기재하고 있다. 사실혼 상태인 비혼 동거 커플은 연금수령 등 가족관계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마다 개별법이 요구하는 여러 증명자료를 따로 제출해야 한다. 그 기준도 법마다 달라서 결혼식 사진이나 인우보증서를 제출하기도 하고, 법원 판단까지 받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번잡한 절차를 거쳐도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가족정책 근간인 건강가정기본법도 가족을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단위’로 협소하게 정의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5년 건강가정기본법이라는 법명 자체가 “전형적 형태 외의 가족을 건강하지 않은 가정으로 보는 것이고, 법률상 정의에 해당하지 않는 가족·가정 형태에 대한 차별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며 수정을 권고하기도 했다. 시대착오적 내용도 적지 않다. ‘모든 국민은 혼인과 출산의 사회적 중요성을 인식’(제8조)해야 한다거나, ‘가족 구성원과 정부·지방자치단체는 가족 해체를 예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제9조)는 식이다.
법과 제도는 혼인·혈연에 얽매여 있는 사이, 사람들의 인식은 빠르게 변화했다. 여성가족부가 지난해 성인 1500명을 대상으로 벌인 ‘가족 다양성 국민 여론조사’에선 10명 중 7명(69.7%)이 ‘혼인·혈연관계가 아니어도 주거·생계를 공유한다면 가족이라 여길 수 있다’고 답했다. 전년 대비 2.2%포인트 올라간 결과다. 70.5%는 사실혼, 비혼 동거 등 법률혼 이외 혼인에 대한 차별 폐지가 필요하다고 봤다. 절반 가까이(48.3%)는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는 것도 수용 가능하다고 답했다.
정부는 최근 다양한 가족 구성권 논의를 위한 첫발을 뗐다.
여성가족부는 지난달 발표한 제4차 건강가정기본계획(2021~2025)에서 ‘건강가정’ 용어를 다양한 가족을 포용할 수 있는 가치중립적 용어로 대체하고, 민법상 가족의 정의와 범위도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생계와 주거를 함께하는 ‘실질적 돌봄 공동체’ 구성원들이 가족돌봄지원 제도, 피부양자·유족 범위 등에서 가족에 준하는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방안도 논의하겠다고 했다.
가족정책의 큰 방향이 제시됐지만 난관은 적지 않다. 김순남 가족구성권연구소 대표는 “정부의 추진방향이 실질적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민법·건강가정기본법 개정을 비롯해 현행법 240여개에서 언급하고 있는 가족을 일일이 재평가하는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고 했다. 정부가 동성 커플 권리 보장에 대해 ‘국민 합의가 우선’이라고 답을 피한 것은 사회적 공론화 자체를 피하는 무책임한 태도라는 지적도 있다.
이 때문에 수년째 지지부진한 생활동반자법 입법 논의를 재개할 시점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2014년 초안이 마련됐으나 보수단체 등의 반대로 발의조차 되지 못한 생활동반자법은 특정인 1명과 동거하며 부양하고 협조하는 관계를 맺고 있는 성인을 ‘생활동반자’로 규정하고, 배우자에 준하는 대우를 받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생활동반자법안 초안 작성에 관여했던 황두영 보좌관(장철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은 “정부가 혈연·혼인 중심 가족제도의 한계를 공개적으로 처음 인정한 만큼 중요한 물꼬가 트였다고 본다. 결혼이라는 제도 바깥에서 서로를 돌보면서 실질적인 가족생활을 하는 이들을 더는 제도 바깥으로 밀어내선 안 된다”고 했다.
임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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