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대한민국헌법>, 법제처 · 대한민국국회 제공, 1987
정유라. 어쩌면 그녀는 현 시국과 관련된 그 누구보다도 이후 역사적 인물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녀는 시대의 상징이다. 지금 젊은이들의 분노와 좌절은 당사자가 아니면 이해하기 어렵다. 그녀는 이곳이 신분사회라는 것을 증명했고 자랑했다. 재벌도 아니고, 그저(?) ‘대통령과 친한 엄마를 둔’ 그녀의 계급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사회적 특수계급! 헌법에 나오는 표현이다.
헌법 제2장 제11조의 세 조항 중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①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②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
신자유주의 체제 이후 급속히 “창설”되고 있는 이 “사회적 특수계급”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떻게 형성되고 있을까. 정유라 한 명은 아닐 것이다. 거꾸로 생각해본다.
내게 ‘올해의 인물’은 지난 5월28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숨진 김군(19)이다. 김군, 생각해보니 이름도 모른다. 그가 산 인생은 19년.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취직을 걱정했고, 그의 어머니는 “책임감 있는 아이로 키운 것을 후회한다”며 울부짖었다. 김군의 사망 소식을 접한 날 아침, 내 눈물이 신문지를 적셨다. 주변에 김군 또래인, 잘사는 집 아이들은 대개 영미권이나 중국의 ‘명문대’에 다닌다. 외국어, 악기, 운동 등 여러가지 취미를 즐긴다. 방학에는 부모와 여행도 다니고 자원봉사도 한다.
“사회적 특수계급”은 가족과 이성애 제도처럼 자연스러워 보이는 문화를 총동원한 일종의 욕망 공동체다. 민주노총을 주도하는 한 대기업 노조가 사쪽에 제안한 협상안에 “자녀 조합원 승계(입사)” 조항을 넣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다. 모든 곳에서 세습이 이루어지고 있다. 연예인, 진보 인사들도 자신의 명성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을 당연시한다. ‘누구는 누구의 딸/아들’이다. 예능 프로그램은 연예인 자녀들이 점령한 지 오래다. 유사 금수저 계급(대기업 정규직 노조원, 연예인, 유명한 운동권)의 부모도 갖지 못한 젊은이에게는 기회의 평등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고3 시절, 나는 ‘12년의 노력과 미래가 단 하루 만에 결정된다’는 생각에 내내 억울했다. 그나마 그때는 점수만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혼자 힘으로’ 기회의 평등을 누릴 수 있었다. 지금은 부모의 계급 변수 없이 자녀의 진로를 설명할 수 없다. 중년 여성인 지금, 내 조건은 다른 방식으로 나빠졌다. 한 분야에서 일한 지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자원이 남성에게 집중된 한국 사회에서 가족 내 남성도 애인(‘스폰서’)도 없다. 남성 네트워크와의 ‘적대’ 속에서 오로지 내 능력으로만 살아가야 한다. 사랑의 이름으로 남성의 자원을 승계받는 일부 여성과 ‘페미니스트’인 내 조건이 같을 수 없다. 자매애? 자매애가 이성애를 이길 수 있다면 가부장제가 아니다.
세계 자본시장에서 무역 규모 10위권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은 새로운 봉건사회를 건설 중이다. 보수/진보/페미니스트 불문, 동참에 거리낌이 없다. 가족과 이성애 제도는 정치 밖에 있다. 모두가 100m 달리기에 출전할 수 있다지만, 출발선의 사정은 다르다. 아이를 업은 사람, 아픈 사람, 운동화가 없는 사람, 관중의 눈총을 받는 사람. 출발선에 서기를 포기한 이들까지. 반면, 사회적 특수계급인 ‘범(汎)금수저’들은 간편한 옷차림으로 워밍업을 하고 있다.
나의 가치관이 헌법에 근거하고 있지는 않지만, 박근혜 게이트 이후 분노와 역겨움을 참을 수 없다 보니 헌법 개조(改條)를 소원해본다. “젊은이는 부모의 지위에 의해 인생이 결정된다. 여성은 자원 있는 남성을 이용(사랑)한다. 이는 유구하면서도 분명한 세습제이므로 사회 공동체는 이의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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