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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정희진의 어떤 메모] 작가는 지배하기 위해서 쓴다

등록 2017-09-08 21:51수정 2017-09-09 16:52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지배와 해방’, <예언자>, 이청준 지음, 문학과지성사, 1977

세상에는 좋은 글귀가 많다. 그것을 나눠 갖고 싶은 것이 독자의 마음이요, 이 마음이 ‘작가의 지배’다. 아래 문장을 함께 감상하고 싶다.

“…삶은 견딜 수 없이 절망적이고 무의미하다는 현실의 운명과, 이 무의미한 삶을 무의미한 채로 방치할 수 없는 생명의 운명이 원고지 위에서 마주 부딪치고 있습니다.”(김훈, 2001)

“…소설을 쓴다는 것은 언제나 막막하고 아득합니다. 이 막막함과 아득함 위에 하나의 형태, 하나의 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가혹한 고통이며 동시에 한없는 위안입니다. 고통이 위안이 된다는 것. 이 이상한 열정이야말로 제가 세상을 향해 유일하게 드러내는 운명의 모습입니다.”(정찬, 1992)

“속에서 웅얼거린다… 속에는 말의 고통, 말하려는 고통이 있다. 그보다 더 큰 것이 있다. 더 거대한 것은 말하지 않으려는 고통이다.”(차학경, 1982) 거대한 것은 말하지 않으려는 고통, 말하면 버림받는 고통. 그러나 말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

위 문구들은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대변한다. 이런 언어가 나올 때까지 작가의 노동과 “가혹한 고통”은 그/녀만이 감당해야 한다. 세상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외로움이다. 머릿속이 우주처럼 비어 있는 상태. 독자의 윤리는 일일이 찾아 읽는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술술 쓸 수 있을까’ 감탄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많이 읽고 쓰고, 생각하기. 이 세 가지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재를 믿지만, 걸작은 한 인간의 운명적 순간, ‘절정’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이런 책들은 학술서보다는 문학이, 외국작품보다는 한국소설이 많다. 여섯 편의 중단편이 수록된 이청준의 소설집 <예언자>도 그런 작품 중 하나다. 출간된 지 40년이 되었는데도 ‘나의 지금 여기’가 이 책에 있다. 왜 사는가(회의), 더 열심히 살고 싶다(의욕), 혹은 은둔을 고민하는 모든 이에게 권한다.

쓰기는 말하기이고, 말하기는 사는 것이다. 왜 사는가? 뻔한 우문이건만, 벗어날 수 없는 질문이다. 신경숙씨가 표절 논란 당시 다음과 비슷한 말을 했는데, 기억에 남는다. “(상황이 어떻든 간에) 저에게 문학은 생명입니다. 글을 쓰지 않으면 저는 죽습니다.”

“우리 시대 대표적 작가의 관심 폭과 한국문학이 보여주는 최대한의 수준을 가늠해주는”(김현) <예언자>에 실린 단편 ‘지배와 해방’의 부제는 “언어사회학서설③”이다. ‘지배와 해방’에 의하면, 글을 쓰는 이유는 글쓴이 자신의 동기와 인간적 욕망에서 출발한다.

그 첫 번째 형식은 일기와 편지다. 다음은 바깥 세계에 대한 강렬한 복수심과 지배욕이다. “작가는 지배하기 위해 쓴다.”(129쪽) 조화롭고 창조적인 지배, 화해하는 지배다. 그렇다고 이 지배가 마음대로 되느냐. 당연히 그렇지 않다. 펜의 지배와 칼의 지배가 같다면, 언어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대개 작가는 패배한다. “진정한 글장이로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늘 현실의 패배자… 영원한 신인, 영원한 삶의 순례자로서 언제나 새로운 고행 앞에 다시 서지 않으면 안 되는 숙명.”(318쪽)

‘지배와 해방’에는 왜 쓰는가, 정치색, 문예사조, 글의 종류 등 언어 행위의 근본적인 주제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소설의 형식 자체가 강의 테이프 녹취록이다. 이 작품의 문장은 굉장히 정확하게 읽히는데, ‘이 지면의 임무인 요약 소개’가 어려웠다. 생각해보니, 한 줄 한 줄이 핵심이라 요약의 의미가 없었다.

나는 작가는 아니지만 원고를 많이 쓰는 편인데 왜 쓰는가를 질문해 본 적이 없다. 처음부터 생계였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럴수록 독자를 염두에 둬야 하는데 내 멋대로 살았다. 무엇보다 지금은 ‘이청준의 1977년’이 아니다. 모든 이들이 작가이며, 작가 자체가 상품인 시대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 필자의 사정에 따라 이번 회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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