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의 전화가 24일 오전 서울 관악구 신림동 한 공원에서 마련한 ‘공원 여성살해 사건 피해자 추모 및 여성폭력 방치 국가 규탄 긴급행동’에 참가한 시민들이 사건 현장에서 고인을 추모하는 묵념을 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페미사이드’(여성살해)가 또 벌어진 서울 관악구 신림동 등산로에 피해자를 추모하는 이들이 모였다. 피해자가 폭력을 당한 자리 앞에서 누구 하나 입을 떼지 못했다. 수 분간의 침묵 속에 “여성폭력 방치국가 규탄한다”는 손팻말만 조용히 놓였다.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의전화 등 90개 여성·인권시민사회단체는 24일 오전 10시 ‘공원 여성살해 사건 피해자 추모 및 여성폭력 방치 국가 규탄 긴급행동-성평등해야 안전하다' 집회를 열고, 성폭력·살인 사건이 발생한 신림동 등산로에서 시작해 신림역 2번 출구까지 행진했다. 이 자리에는 여성단체 관계자와 피해자의 지인들, 일반 시민들까지 200여명이 모였다.
등산로를 따라 행진할 때, 행사와 관계없이 산책을 나온 등산객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라고 물어보는 등산객이 있을 정도로 사건 현장은 인근 주택가 주민들이 즐기는 일상적인 산책로였다. 이날 행사 참가자들이 가장 분노한 지점도 누구나 쉽게 닿을 수 있는 공간인 산책로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흉악범죄’가 벌어졌다는 점이었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직장인 이은지(28)씨는 “밤에도 낮에도, 공원 산책로, 출근길, 화장실, 집 앞까지. 점점 갈 수 있는 곳과 할 수 있는 것이 줄어들기만 한다. 이것이 과연 개인이 노력한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인가. 개인의 문제에 불과한 것인가”라고 물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의 전화가 24일 오전 서울 관악구 신림동 한 공원에서 마련한 ‘공원 여성살해 사건 피해자 추모 및 여성폭력 방치 국가 규탄 긴급행동’에 참가한 시민들이 공원 입구에서 사건 현장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추모사를 듣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2016년 5월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이 발생한 뒤 여성 안전에 대한 논의 필요성이 사회 전반에 요구됐으나, 지난해 7월 인하대 성폭력 사망사건, 지난해 9월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 지난 17일 신림동 성폭행·살인 사건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여성폭력은 끊이지 않고 있다. 대검찰청의 ‘2022 범죄분석’ 자료를 보면, 2021년에 발생한 흉악범죄 사건 3만2242건 가운데 피해자가 여성인 사건은 87.6%(2만8228건)에 달한다.
그럼에도 정부와 정치권은 명백한 여성혐오 범죄에 ‘묻지마’, ‘무차별’이라고 이름 붙이며 ‘여성’이란 이름을 지우고 있다. 정부는 가석방을 허용하지 않는 무기형 신설을 추진하고, 경찰 장갑차 동원, 불심검문 등 물리력을 동원한 대책만 내놓고 있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에도 여성혐오 범죄로 보지 않고, 공중 화장실 앞 폐회로티브이(CCTV) 설치, 비상벨 설치 등 근시안적인 대책만 내놓은 바 있었다.
김수정 한국여성의전화 공동사무처장은 “흉악범죄의 주된 피해 대상은 여성이고, 여성을 동등한 존재로 보지 않는 인식에서 젠더폭력이 발생한다”며 “사회 불안을 해소하고 안전한 사회를 위한 대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흉악범죄가 성별에 기반한 젠더폭력 양상을 보인다는 사실을 외면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이날 참가자들은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정부의 기조 하에 최소한에 불과했던 성평등 정책은 지속해서 축소돼왔으며, 국민을 지켜야 했을 국가는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묵살하고, 관련 정책을 축소‧폐지하거나 엉뚱한 대책을 내놓는 행태 끝에 결국 또 다른 죽음을 막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행진하는 내내 “장갑차 대신, 호신용품 대신 성평등”을 외치며 정부의 ‘흉악범죄 대책’을 규탄했다.
채윤태 기자
chai@hani.co.kr, 오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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