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해도 소용없어.’ 인권단체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가 지난해 5월17일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아이다호 데이)을 맞아 내 건 문구다. 해당 문구는 같은 해 퀴어퍼레이드에서도 사용되며 성소수자와 앨라이(ally·성소수자 인권 지지자) 공감과 반응을 끌어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는 올해 ‘미워해도 소용없어 2023’ 캠페인을 시작한다. 지난해 캠페인이 혐오와 차별에 대항하는 성소수자·앨라이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이번에는 자신을 긍정하며 현재를 살고 있는 모습에 주목한다. 〈한겨레〉도 이 캠페인에 동행했다. 시리즈는 17일까지 총 6차례 계속된다.
성미산학교 성소수자 인권 모임 ‘무운’ 회원인 똘추와 노랭, 마농, 이응이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제공
‘퀴어(성소수자) 가시화 활동을 하자!’
2018년, 성미산학교 8학년(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똘추’(활동명)와 친구 둘이 뭉쳤다. 성소수자들이 당당히 자신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학교 안에 성소수자 인권 모임을 만들자는 게 이들의 계획이었다. 모임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친구들끼리 고민을 하던 차,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말 그대로 ‘구름 하나 없는’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무운.’ 누군가 입에 올린 단어는 그렇게 성미산학교의 성소수자 학생 인권 모임의 이름이 됐다. “두 가지 의미를 생각했어요. 성소수자 혐오가 있는 한국에서 성소수자로 태어났으니 ‘운이 없다’는 뜻도 되지만, ‘무운을 빈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우리 모두 탈 없이 잘 살아가자는 의미도 담았어요.”
무운의 ‘원년 멤버’인 똘추(19)가 지난 7일 앰네스티와 함께 〈한겨레〉와 만나 5년 전 무운 탄생 ‘비화’를 들려줬다. 무운의 첫 활동은 ‘비밀 작전’ 하듯 시작했다. 똘추는 “아우팅(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성소수자임이 공개되는 것)이 무서웠다”고 말했다.
두근두근 하는 심정으로 이들이 한 첫번째 프로젝트는 ‘레인보우 포스트잇 프로젝트’다.
평소보다 1시간 일찍 등교해 게시판과 각 층 복도, 엘리베이터 등 학교 곳곳에 퀴어에 대한 소개, 퀴어 혐오가 잘못된 이유 등을 적은 형형색색의 포스트잇을 붙였다.
학교에 성소수자가 있다는 사실을 신기하게 여긴 몇몇 학생들이 이들의 활동에 관심을 보였다. 특히 성소수자 학생들이 이 레인보우 포스트잇을 반겼다. 노랭(19)도 그 중 한명이었다. 그는 “퀴어의 존재에 대해 잘 모르다가 무운을 통해 알게 되고 자신을 정체화하게 됐다”고 말했다. “교내에 비슷한 친구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기뻤어요. 그 ‘작당 모의’에 저도 끼고 싶었어요.” 그렇게 노랭도 2019년 무운에 합류했다.
초등학교 1학년~고등학교 3학년까지 통합 과정으로 이뤄지는 대안학교인 성미산학교에서 현재 전체 학생 100여명 중 8명이 ‘무운’에서 활동하고 있다. 무운은 이제 공개 모임으로 바뀌었다. 똘추는 “처음에는 제가 퀴어인 것이 알려지면 친구들이 나를 멀리하고, 주변에 아무도 없어지는 게 아닌지 걱정했다”며 “무운 회원들이 늘어나다 보니, 내가 소외당한다 하더라도 이 친구들과 놀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섭지 않게 됐다”라고 말했다. 마농(17)은 똘추의 ‘퀴어 강의’를 듣고 무운에 가입했다. “퀴어라는 단어도 사실 잘 몰랐는데, 세상에는 다양한 성정체성‧성적지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무운이 활동을 시작한 뒤 학교엔 작은 변화가 생겼다. 나이에 상관없이 별명을 부르기로 한 것이다. 덕분에 2019년부터 성미산 학교에는 형, 누나와 같은 호칭이 사라졌다. 이성애를 전제로 한 ‘남자친구’나 ‘여자친구’라는 표현 대신 ‘애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문화도 자리 잡혔다. 무운 회원들은 소수자를 이해하는 무운의 활동이 이런 변화를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인터뷰 내내 ‘부모님’이라는 말 대신 꼬박꼬박 ‘양육자’라는 단어를 썼다. ‘부’와 ‘모’로 이뤄진 이른바 ‘정상가족’을 기본값으로 말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무운 회원 이응(17)은 “한국 사회에서 고등학생이라면 입시를 열심히 해야 하고 대학에 가고 좋은 곳에 취직해야 한다는 ‘정상루트’들이 있잖아요. 대안학교 학생을 신기하게 생각하고 다른 것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죠. 하지만 제도권 밖에도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무운의 활동은 학교 안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2020년, 성미산마을 주민 50여명을 대상으로 ‘퀴어 설문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퀴어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지, 주변에 커밍아웃을 한 사람이 있는지 등을 물었다. 이응은 “주변에 퀴어가 있어도 괜찮다고 답했지만, 내 가족의 커밍아웃에는 부정적인 반응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격차를 줄이는 게 무운의 목표다. “성소수자를 위한 정치·제도적 기반이 있어야 하는데 보장되지 않고 있어요. 오히려 성소수자의 권리 보장 내용이 들어간 학생인권조례 같은 것도 없애버리려고 하고요. 인식이 바뀌면 정치 영역에서도 변화가 생기니,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려고 하고 있죠.” 마농이 힘주어 말했다.
물론 학교 밖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이들도 안다. 지난 4일 서울시가 서울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의 서울광장 사용을 불허한 게 대표적이다. 이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에 맞서기 위해,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해 목소리를 낼 예정이다.
눈에서 무지개가 나오는 고양이 배지도 제작해 판매하기로 했다. 노랭은 “퀴어퍼레이드처럼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인파들 속에서 떠밀려 가는 기분이 좋다”라고 말했다.
성미산학교 성소수자 인권 모임 ‘무운’ 회원인 똘추와 노랭, 이응, 마농.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제공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덕분에 또다른 소수자에 대한 관심 또한 크다. 똘추는 ‘동물권’, 노랭은 ‘베트남 참전군인’, 이응은 ‘미등록 이주민’, 마농은 ‘노인’에 관심이 있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다양한 모습이 사실 모두 연결돼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주면 좋겠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그래서 이들도 다양한 소수자와 함께 한다. 마농은 “한 명씩 사회에서 그 존재를 지워나간다면 다음에는 지워버릴 또 다른 존재가 필요할 것”이라며 “그러면 아무도 남지 않는다. 우린 모두 연결돼 있다”라고 했다. 이들에게 ‘사랑은 연결’이다.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미워하는데 자기 에너지를 쓰는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도태될 것’이라고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느라 자신을 미워하지 말고, 우리 곁에 있는 사람과 사랑의 힘으로 버티다 보면 언젠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응이 모든 소수자의 ‘무운’을 빈다며 말했다.
이들은 함께 외쳤다. “미워해도 소용없어. 지워지지 않을 거야.”
이주빈 기자
ye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