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해도 소용없어.’ 인권단체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가 지난해 5월17일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아이다호데이)을 맞아 내 건 문구다. 해당 문구는 같은 해 퀴어퍼레이드에서도 사용되며 성소수자와 앨라이(ally·성소수자 인권 지지자) 공감과 반응을 끌어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는 올해 ‘미워해도 소용없어 2023’ 캠페인을 시작한다. 지난해 캠페인이 혐오와 차별에 대항하는 성소수자·앨라이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이번에는 자신을 긍정하며 현재를 사는 모습에 주목한다. 〈한겨레〉도 이 캠페인에 동행했다. 시리즈는 17일까지 총 6차례 계속된다.
젠더프리 배우 강다현씨.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제공
☞한겨레 뉴스레터 H:730 구독하기. 검색창에 ‘한겨레 730’을 쳐보세요.
“우리 누나가요…”
2021년 방영된 〈제이티비시〉(JTBC) 드라마 ‘구경이’에서 남도현 역을 맡은 배우가 힘든 삶을 토로하는 대사를 내뱉었다. 방송 이후 온라인에서는 배우의 성별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여성 같기도 하고, 남성 같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입길에 올랐던 주인공은 배우 강다현(31)이다. 강씨는 타고난 성별에 얽매이지 않고 연기하는 ‘젠더프리’ 배우다. 172cm의 큰 키에 짧은 머리, 저음의 목소리. 강씨는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사람들은 종종 그를 남성이라고 여기곤 한다. 연기를 시작한 이후에는 ‘전형적인’ 여성 배역을 맡은 적이 없다. 주로 남성 역할, 퀴어(성소수자) 역할에 캐스팅되곤 했다.
“어릴 땐 연기에 관심이 없었어요. 영상이나 무대에서 저처럼 생긴 배우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강씨는 지난달 30일 서울 용산구 한 스튜디오에서 앰네스티와 함께 <한겨레> 기자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강씨가 연기에 관심을 두게 된 건 20대 중반이 돼서다. 2016년 한 연극제에서 낭독극으로 참여한 게
연기 인생의 시작이다. 당시 작가는 남자 배역을 ‘젠더프리’하게 표현하고 싶어했는데, 젠더 이분법에 구속되지 않은 그를 읽어냈다. “제가 젠더프리 배우를 택한 건 아니에요. 연기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특출난 외모도 아닌 제가 연기를 시작할 수 있었던 건 시기가 잘 맞았어요. 젠더를 표현하는 것에 새로운 질문을 하고, 도전하고 싶었던 시기에 만난 기회였던 것 같아요.”
강씨가 연기하는 캐릭터들은 이분법적인 성별 구분에 구속되지 않고, 넘나든다. 젠더프리 배우가 낯선 탓에 시청자들은 강씨의 연기에 종종 혼란을 느낀다. ‘여자인 것 같은데 누나라고 부르네’, ‘목젖이 있는 걸 보니 여자가 아니라 남자네’ 같은 댓글이 달린다. 강씨는 개의치 않는다. 자신이 무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삶의 의미를 줄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성인 제가 남성·퀴어를 연기할 때 ‘나의 경험과 똑같다’ ‘힘이 됐다’는 반응을 매번 들었어요.” 강씨는 연기를 통해 ‘성별에 한계가 있는지’ 질문하고 싶다.
강씨는 퀴어 캐릭터를 연기할 때 특별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퀴어성을 드러내는 게 작품 내에서 중요한 주제인 경우도 있지만, 아닌 경우도 있어요. 그냥 ‘존재하는 것’, 그 존재가 일상을 사는 것에 집중할 때 주는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자칫 자신이 그리는 성소수자 캐릭터가 성소수자를 대표하는 것처럼 여겨질까봐 조심한다. 영화나 드라마 등 매체에서 다루는 성소수자 캐릭터는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퀴어 캐릭터를 연기할 때 제가 제대로 연기하고 있는지 늘 고민해요. 성소수자 캐릭터를 ‘뾰족하게’ 그렸다가, ‘성소수자는 뾰족하구나’라는 오해를 살까봐요.”
착한 사람, 나쁜 사람, 예민한 사람, 둔한 사람…성소수자들도 각양각색이다. 성소수자들의 다양한 모습을 표현하려면 더 많은 성소수자 캐릭터가 매체에 등장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서로에 대해 너무 모르기 때문에 (성소수자의 다양한 모습을 그려내는 데) 긴장하고 겁을 먹는 것 같아요. 낯선 성소수자 캐릭터라도 진심을 드러낼 수 있다면, 일부라도 사랑받고 공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강씨는 성소수자 캐릭터를 대중에게 사랑받도록 만들고 싶다. “(성소수자를) 낯설게 느끼는 이들이 (캐릭터를 통해) 애정을 가져야 (성소수자 문제를) 한 번이라도 더 들여다보고 적극적인 상상을 해줄 같아서”다.
젠더프리 배우 강다현씨.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제공
강씨는 최근 운동을 하고자 하는 여성들을 도우며 성별 구분을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시작은 친구들이었다. 친구들과 밥 먹고 농구하고, 밥 먹고 배드민턴 하는 일상을 반복했다. 변화가 생겼다. 친구들이 먼저 다른 운동을 찾아보고, 경험해보고 싶다고 그에게 말한 것이다
. “몸은 인간이 평생 반드시 함께 가야 하는 장소, 절대 헤어질 수 없는 장소예요. 내 몸과 내가 편안한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일 때 가장 편안한 곳에 있다고 느껴요. 그런데 운동하는 여성이 적어 안타까웠어요. 체육관에 여성이 적어 부담을 느낀다고도 하더라고요. ”
강씨는 2020년 파쿠르(지형지물을 극복하며 길을 만들어 이동하는 스포츠) 자격증을 따서 여성 입문 수업 섭외가 올 때마다 클래스를 열고 있다. 킥복싱 코칭 자격증도 준비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이 건강하고 즐겁게 사는 게 본인의 행복”이라고 그가 말했다.
강씨의 다음 도전은 음악이다. “어릴 때부터 남성 화자의 가사를 좋아했고 그 부분이 혼란스럽기도 했어요. 여성 화자이지만, 스테레오 타입대로 노래하지 않는 콘텐츠를 만들어 보고 싶어요. 화자가 여성인지 남성인지 혼란을 주는 음악적 콘텐츠도 만들고 싶고요.”
강씨는 자신을 ‘전형적이지 않다’며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에게 지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를 “툭하면 힘을 얻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미워하는 마음이 저보다는 본인을 힘들게 할 것 같아요. 어떤 마음을 갖든 그건 자기 것이지 내 것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미워해도 소용없어. 거기서 시작될 테니까.”
이주빈 기자
ye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