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준이(가명·왼쪽)가 지난달 25일 오후 강원도 춘천의 집에서 트럼펫을 잡고 있는 모습을 어머니 박영미(가명)씨가 지켜보고 있다. 춘천/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처음엔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악기를 잡을 때마다 손끝에 금속의 차가움이 느껴져 놀라곤 했다. 하지만 이제 민준이(가명·17)에게 트럼펫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친구’다. 집이 아파트에서 방 한 칸으로 바뀌고 ‘빚쟁이’들이 집을 찾아올 때도 트럼펫은 민준의 곁에 있었다. “트럼펫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쉽지 않다는 것, 그 점에 매력을 느꼈어요.” 지난달 25일 강원도 춘천에서 만난 민준의 입술은 트럼펫 연습 탓인지 핏기가 없어 보였다.
민준이는 초등학교 3학년 때 트럼펫을 교회에서 처음 접했다. 엄마 박영미(가명·42)씨가 7개월간의 지난한 이혼 절차를 마쳤을 때였다. 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린 민준이는 잘 알지 못했다. 어렴풋이 눈치로 느꼈다. 아빠가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날이 갈수록 수척해졌다.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만 돈을 갚으라며 집으로 찾아왔다. 작은 아파트였던 집이 한 칸짜리 방으로 바뀌었다.
2살 터울인 누나는 이사 뒤 민준이가 아무 때나 집 밖으로 나갈 수 없게 했다. 막 사춘기에 접어든 누나가 학교 바로 앞에 있던 방 한 칸의 낡은 집을 친구들에게 알리기 싫어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누나는 현관문에 귀를 대고 바깥 소리를 유심히 듣다가 지나가는 학생들의 소리가 잦아들면 민준에게 “이제 나가자”라며 문을 열었다. “중학생이 되고 나서야 누나를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 방에서 사춘기 남매와 엄마는 6년을 버텼다.
직진하는 소리. 민준이는 트럼펫이 내는 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자신의 머릿속을 혼란하게 헤집던 일들을 트럼펫으로 잊을 수 있었다. 단단한 금속 안으로 가슴속에 가득 담아 둔 숨을 불어넣었다. 어느 순간부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민준에게 그 소리는 날마다 더 앞을 향해 뻗어 나갈 수 있는 희망의 소리였다. “고음 ‘도’를 소리 내면 ‘레’를 내보고 싶었어요. ‘레’를 낼 수 있게 되면 악보 한 개쯤은 완벽하게 연주하고 싶었고요.”
엄마에게도 트럼펫은 살아가는 힘
민준이 엄마는 이혼 뒤 먹고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다.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아무것도 없는 방에 덩그러니 있었다. 엄마는 자주 우울했고, 민준이가 자신의 모습을 닮을까 두려웠다.
어느 날, 엄마는 춘천문화재단의 문화예술교육사업인 ‘신나는 오케스트라’에서 신입 단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봤다.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무상 오케스트라 교육이었다. 단원으로 뽑히면 일주일에 두번씩 연습을 시켜준다고 했다. “그러면 민준이가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정서 안정에도 도움이 될 수 있고요.”
지원 서류를 쓰던 날까지 엄마는 민준이가 교회에서 트럼펫을 다루고 있던 걸 몰랐다. 민준이가 ‘다룰 줄 아는 악기’에 트럼펫을 적어넣자 엄마는 놀랐고, 악기로 힘든 시간을 견디고 있던 민준이가 기특했다.
민준이가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고 몇달 뒤 첫 연주회가 열렸다. 여유 없이 살아온 박씨에게 연주회는 처음이었다. 자식들의 연주를 축하하기 위해 꽃다발을 챙겨 온 사람들을 둘러본 박씨는 자신의 빈손을 매만졌다. 거친 손등이 느껴졌다. “꽃을 가져가야 한다는 것도 몰랐어요.” 그날을 잊을 수 없던 박씨는 아들의 다음 연주회 때 꽃을 사 갔다. 꽃다발을 품에 안고 민준이의 연주를 지켜보고 있자니 그렇게 마음이 든든할 수가 없었다. 무뚝뚝하지만 속 깊은 아들은 꽃다발을 받아들고 “다음부터는 가져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지금껏 민준이가 참가한 크고 작은 스무번의 연주회에 엄마는 아무리 바쁘고 몸이 아파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엄마는 표지가 각기 다른 연주회 팸플릿을 지금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엄마를 바라보던 민준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이 돼서 아트센터인천 콘서트홀 1등석 자리를 엄마에게 주는 게 소원이에요. 사실 연주회 관람은커녕 그 건물에 가본 적도 없지만요.”
트럼펫 연주가가 꿈인 민준이가 초등학생 때부터 받은 상장과 임명장. 춘천/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엄마도 민준이도 트럼펫으로 힘을 내보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현실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아버지의 폭력이 시작되면서 엄마와 민준이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아버지는 민준이가 태어나고 1년 뒤부터 박씨에게 손찌검을 했다. 박씨는 그때 당한 폭력으로 어금니를 모두 잃었고 아직 치료하지 못하고 있다.
이혼 뒤 폭력에서는 벗어났지만 엄마는 전남편이 만들어놓은 빚의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전남편은 회삿돈을 횡령하고, 박씨 몰래 명의를 도용해 무리하게 사채를 썼다. 이혼 뒤에도 박씨 앞으로 남은 빚은 이자가 붙고 붙어 7억원으로 불어났다. 박씨는 매일같이 들이닥치는 빚쟁이들을 상대하면서 개인파산을 신청했다. “먹고살아야 하기에 식당이며 닭갈비 축제며 돈 되는 곳은 다 돌아다니며 쉴 틈 없이 일했어요. 손이 베이고 발톱이 빠져나갔죠. 어느 순간에는 허리가 아파 화장실도 갈 수 없었어요.”
박씨가 깨닫지 못했을 뿐 정신은 몸보다 더 망가져 있었다. 길을 걷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구급차에 실려 가고 나서야 정신과를 찾았다. 박씨는 우울증, 공황장애, 불면증 진단을 받았다. 박씨는 척추협착증, 천식, 비문증, 이석증, 고혈압 약에다가 정신과 약까지 매일 약을 한주먹씩 털어 넣는다.
엄마의 몸은 근로능력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6년 전부터 기초생활수급자가 됐다. 한달에 120만원이 되지 않는 금액으로 세 식구가 산다. 월세 16만원, 에어컨·세탁기·냉장고 등 각종 가전제품 임대료 15만원, 임대아파트에 오기 위해 지인들에게 갚아야 하는 돈이 매달 빠져나간다. 박씨가 3년 전 주변의 도움을 받아 겨우 마련한 춘천의 임대아파트 현관문 옆에는 늘 쌀이 담긴 페트병들이 놓여 있다. 기초생활수급자라 지원받은 쌀이다. “저게 나라미예요. 쌀이 없어서 못 먹다가 저걸 보면 마음이 그리 뿌듯해요. 일부러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뒀어요.”
민준이는 트럼펫 연주자가 되고 싶은 자신의 꿈을 “철없는 도전”이라고 했다. 민준이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트럼펫으로 입시를 준비해야겠다는 꿈을 꿨다. 그때 ‘신나는 오케스트라’에서 만난 유명한 트럼펫 연주자가 민준이에게 “트럼펫을 제대로 한번 해보라”고 조언했다. “진짜 하고 싶었는데 그 말을 듣고 나니까 더 확신이 생긴 거예요. 저도 집안 사정을 아니까 어머니에겐 미안한 마음이 항상 있어요. 그런데 트럼펫을 너무 하고 싶어서, 그 마음 하나로 밀어붙이면서 하고 있어요. 죄송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는….”
현재 민준이는 춘천시립청소년교향악단에 소속돼 있다. 월드비전 춘천종합사회복지관에서 선물로 받은 미니 트럼펫은 점점 자라는 민준이의 입과 맞지 않았다. 작년에 월드비전 꿈지원금으로 중고 트럼펫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입시용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입시를 하려면 시(C)와 비(B)플랫 트럼펫, 최소 두 개가 필요해요.” 700만원에 이르는 트럼펫 비용을 엄마는 감당할 수가 없다.
여유가 생긴다면 민준이는 조금 더 욕심을 내보고 싶다. “월, 수, 금, 일…. 이틀에 한번씩은 레슨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하루 배우고 다음날 바로 연습할 수 있게요. 지금은 일주일에 한번 레슨을 받다 보니 그사이에 연주를 잘못하거나 나쁜 습관이 생겨도 교정받을 수가 없거든요.” 민준이는 작년부터 월드비전 꿈지원금으로 레슨을 받을 수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은 입시준비생에게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 지원도 다음달이면 끝난다. 또 연습실도 마음껏 이용하고 싶다.
“어린이 병동에 있는 소아암, 심장병 환자들에게 ‘로보카 폴리’를 연주해준 적이 있어요. 그때 기뻐하던 아이들의 모습이 기억나요. 열심히 해서 나중에는 제자들도 키우고 싶어요.” 가장 신났던 순간을 묻는 말에 민준이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이주빈 기자
y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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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이후
<한겨레>와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이 함께한 ‘나눔꽃 캠페인’을 통해 희귀 난치성 뇌전증을 앓는 지환이 사연(<한겨레> 5월6일치 12면)이 소개된 뒤 총 2894만9986원(5월31일 기준)의 정성이 모였습니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은 “모두가 어려운 시기에도 우리 아이들을 위해 따뜻한 마음을 보내주신 일시계좌 후원자 348분, 네이버 해피빈 후원자 929분께 감사드린다. 소중한 후원금은 지환이를 비롯해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잘 전달하겠다”고 전해왔습니다. 지환이네 가족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해주신 후원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