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월1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지난 6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지배권) 불법 승계’ 의혹 공판이 열린 서울중앙지법 417호 형사대법정에 50대로 추정되는 남성이 증인석에 섰다. 삼성증권에서 10년 넘게 일하고 지금은 한 외국계 증권사 임원으로 있는 한아무개씨였다. 한씨가 앉은 증인석 책상 위에는 높이가 10㎝ 정도 되는 에이포(A4) 용지 뭉치가 있었다. 한씨가 삼성증권에서 작성한 문건과 삼성 관계자들과 주고받은 이메일 출력물 등으로 증인신문 도중 참고할 수 있도록 검찰이 올려둔 것이었다.
한씨는 삼성증권 재직 때 아이비(IB)본부 기업금융팀장을 맡아 2012년께부터 이 부회장의 그룹 승계 관련 업무를 직접 수행했다. 검찰의 말을 빌리면, 한씨는 이 부회장 등 피고인들이 받는 공소사실 16개 가운데 13개와 관련된 이 사건 ‘핵심 증인’이다. 검찰은 이 부회장을 비롯해 그와 함께 재판에 넘긴 최지성 전 미래전략실(미전실) 실장(부회장), 김종중 전 미전실 전략1팀장(사장), 이왕익 전 미전실 전략1팀 자금파트 전무 등이 개입한 불법 승계 의혹을 밝히기 위해 한씨를 첫 번째 증인으로 신청했다.
취약한 이 부회장의 삼성물산 지배력…법정서 드러난 삼성의 고민과 해법
한씨는 2012년 10월 미전실과 증권 임직원으로 꾸려진 ‘지배구조 티에프(TF)’ 소속으로 그해 12월 완성된 이 부회장 그룹 승계 계획안 ‘프로젝트 지(G·거버넌스의 약자)’ 작성에 참여했다. 프로젝트 지는 그룹 지배구조 개편안이 담긴 190쪽짜리 보고서다. 이 문건에는 이 부회장의 그룹 승계 핵심이자 이후 ‘불법 승계’ 논란을 일으킨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 계획이 담겨 있다.
이날 법정에서 공개된 프로젝트 지를 보면, 당시 총수일가의 고민이 무엇이었는지가 드러난다. 이 보고서가 작성될 당시 이 부회장은 앞서 1996년 헐값에 발행된 에버랜드 전환사채(CB)를 인수해 에버랜드 지분 31.37%(당시 기준)를 가진 최대 주주였지만, 삼성전자 등 다수 계열사의 지분을 가진 핵심 계열사 삼성물산의 지분은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다. 또한 지배주주 일가의 지분율 3% 이상·내부거래 비중 30%가 넘는 경우 증여세를 매기는 일감 몰아주기 규제가 이듬해인 2013년부터 도입될 예정이어서, 총수일가 지분율이 높고 내부거래 비중이 40% 이상이었던 에버랜드는 일감 몰아주기 과세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지배구조 티에프는 △에버랜드와 삼성물산을 합병해 이 부회장 등이 물산 지분을 확보하게 하고 △동시에 과세 회피 목적으로 에버랜드의 내부거래 비중을 낮추는 방법을 고안하게 된다. 이 계획은 수차례 보완을 거쳐 ①내부 매출 비중이 1%로 낮은 제일모직 패션사업을 에버랜드가 인수하고 ②에버랜드 사업 중 내부 매출 비중이 높은 건물관리사업, 급식관리사업은 떼어 내 에버랜드의 내부거래 비중을 낮춰 과세 문제를 해결, 이후 ③에버랜드를 상장해 ④에버랜드와 삼성물산을 합병해 이 부회장이 통합 물산 법인의 지분을 취득한다는 ‘큰 그림’으로 이어진다. 이날 증인으로 법정에 선 한씨 포함 기업 상장이나 인수·합병(M&A) 업무를 담당해온 삼성증권 아이비본부 임직원은 이 과정에 전방위로 투입됐다.
구조개편 목적이 “과세 문제 해결”이라면서…대외 홍보는 “업종 전문화”?
기업의 사업구조 개편은 기존 사업 경쟁력을 높인다거나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하는 등 회사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해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이날 재판에서 드러난 문건을 종합하면, 삼성 계열사의 사업구조 개편은 사실상 삼성 총수일가의 그룹 지배력 확보와 세금 회피라는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2013년 5월, 미전실은 ‘에버랜드 사업조정 티에프’를 꾸리고 본격적으로 에버랜드 내부거래 비중을 낮추기 위한 작업에 나선다. 두달 뒤인 그해 7월 작성된 ‘일감 몰아주기 대책 추진 보고서’는 미전실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제일모직의 패션사업을 분할해 에버랜드와 합치고, 에버랜드 건물관리사업은 계열사인 에스원에 넘기며, 급식사업은 분할(이후 삼성웰스토리가 됨)한다는 계획이다.
다만, 이런 사업 구조조정에 ‘대주주의 증여세 회피’라는 비판이 예상됐기 때문에 티에프는 본래 목적을 감추는 작업도 함께 진행했다. 법정에서 공개된 문건에 따르면, 티에프는 미전실 전략 1, 2팀 중심의 ‘총괄 티에프’와 각 계열사가 참여하는 ‘서브 티에프’로 구성됐는데, 서브 티에프의 업무 중 하나는 사업 개편에 따른 ‘주주 설득용 논리 개발, 대외 설명 논리 수립’이었다. 대외적으로 공표할 사업 개편의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이 티에프에 참여했던 증인 한씨가 작성한 ‘일감 몰아주기 대책 추진 보고서’에도 제일모직 등 계열사들이 사업을 뗐다 붙였다 하는 작업을 한꺼번에 할 경우 과세 회피라는 비판이 우려된다는 점을 명시해 놓았다. 이를 위해 사업구조 개편을 단계적으로 추진하되 구조조정 이유는 “사업 시너지” 등을 내세워야 한다고 했다. 검찰이 해당 문건의 내용을 추궁하자, 작성자인 한씨는 “오해”라고 주장했다.
“제시된 보고서의 ‘대외 이슈’에서는 ‘대주주의 일감 몰아주기 증여세를 회피하기 위해 계열사 간 사업조정을 강행했다는 비난이 있을 수 있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대응방안으로는 ‘업종 전문화, 사업 시너지 창출이 사업조정의 주목적이라는 등의 대외 설명논리로 적극 대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에버랜드가 제일모직의) 패션사업을 인수하고 급식사업·건물관리사업을 떼는 게 사업 시너지가 주목적이었던 것 맞습니까.” (검찰)
“실제로 의사결정이 된 부분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외부에서 그런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에….” (증인)
“뭐가 오해죠?” (검찰)
“여기 적힌 것처럼 일감 몰아주기 (과세) 해소를 위한 거래라고 오해할 수 있으므로 그런 것들을 내부에서 잘 검토하고 준비하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문구가 좀 정리돼 있어서 목적을 숨긴 것처럼 오해할 수 있는데, 제가 정확하게 저 때 상황 기억 못 하지만, 일해온 관행 등을 봤을 때 그런 부분을 검토하고 조심하자는 의미로 썼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증인)
제일모직 패션 양도 목적 감추기 위해 ‘시나리오’ 지어내
한씨는 “오해”라고 거듭 밝혔지만,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문건은 이날 재판에서 속속 드러났다. 이날 법정에서 드러난 문건을 종합하면, 제일모직의 패션사업 양도는 제일모직의 의사와 상관없이 미전실 주도로 이뤄졌고, 미전실 등은 대외적으로 이런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뒤늦게 사업 양수도 관련 “시나리오”를 지어냈다는 의심을 살만한 내용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2013년 8월17일 미전실과 제일모직·삼성증권 임원 등이 참석하는 패션사업 양수도 관련 회의를 앞두고 한씨는 미전실 김아무개 부장에게 “회의에서 논의할 초안”이라며 한씨와 패션사업 양수도 티에프가 함께 만든 ‘거래진행 명분’을 메일로 보낸다. 메일에는 ‘(제일)모직이 먼저 패션사업 매각을 결정했고, 에버랜드에 먼저 패션사업 양수 의사를 타진했다’는 내용의 ‘거래 명분’이 쓰여 있었다.
검찰은 이러한 거래 명분이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본다. 정작 양도 당사자인 제일모직이 이런 ‘명분’에 반발했기 때문이다. 삼성증권 임원이 당시 패션사업 양수도 관련 회의를 마치고 쓴 메일 내용을 보면, 회의 때 제일모직 임원은 “패션사업 양수도를 제일모직이 먼저 제안한 게 아니라 에버랜드가 먼저 제안한 것으로 정리해 달라. 제일모직 패션사업이 연 6% 성장하고 있는데, 지금 와서 제일모직이 매각하는 건 논리가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당사자의 반발에 이런 ‘시나리오’는 일부 수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그해 9월 증인이 미전실에 보낸 ‘거래 시나리오’ 문건 및 미전실 소속 변호사의 검토 등을 반영한 ‘최종 시나리오’를 보면, ‘2013년 4~5월 제일모직이 투자재원 마련을 위해 패션사업 매각 등을 검토→6월 제일모직이 삼성증권으로부터 패션사업 매각 제안을 수령해 성사 가능성을 검토했고, 삼성증권은 에버랜드가 신규 사업 발굴 중임을 인지하고 에버랜드에 패션사업 인수 의사를 먼저 타진→7월 양사 경영진이 패션사업 양수도에 협의했다’며 삼성증권이 중간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기재됐다.
그즈음 미전실과 삼성증권 관계자들이 주고받은 메일 중에는 완성된 시나리오에 따라 ‘당시에 갖췄어야 할’ 증빙서류를 삼성증권이 직접 사후에 만들어서 보내주는 내용도 있었다. 이에 관해 묻는 검찰에게 한씨는 “사실과 다를 수 있는 부분”, “억지스러운 작업”이라고 인정했다.
“증빙서류 중에 실제 있었던 게 있나요?” (검찰)
“신규 사업을 검토했다거나 재무적으로 사업을 매각하든 (중략) 실제로 내부에서 검토한 자료가 있었을 것입니다. 내부 티에프 안에서 활용했을 거로 기억하고요. 그런 측면에서 실제 있었던 걸 모은 것도 있습니다. 모양새는 소급해 만들었던 거로 기억합니다.” (증인)
“소급해서 만들었다는 게 오해를 유발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있는 ‘증빙’이라고 되어 있는 문건에서 사실과 맞는 게 뭐가 있습니까.” (검찰)
“제가 정확하게 내용을 기억하기가 어려워서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증인)
(중략)
“증인 기업금융 관련해 여러 업무를 했는데, 거래 관련해 시나리오 만들고 증빙자료를 일부든 상당 부분이든 이렇게 만들어도 됩니까?” (검찰)
“사실과 다를 수 있는 부분을 저 때 정리를 저렇게 해놓는 게 굳이 필요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하다 보니 저런 억지스러운 작업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증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해 11월9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차에서 내려 옷 매무새를 정리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시나리오에 따라 발표된 사업구조 개편…에스원에도 적용돼
일련의 과정을 거쳐 2013년 9월23일, 제일모직은 패션사업부를 에버랜드에 1조500억원에 넘긴다고 발표했다. 제일모직은 이와 관련해 “화학 등 소재사업에 집중하기 위해서”라고 했고, 에버랜드는 “테마파크 등에서 축적한 노하우와 결합해 아웃도어 등 새 시너지를 창출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미전실 등이 작성한 구조개편 논리인 ‘업종 전문화’, ‘사업 시너지’와 일맥상통하는 설명이다.
이런 방식은 이후 에버랜드의 건물관리사업 양수도에도 이어진다. 2013년 10월 작성된 ‘거래추진 시나리오’를 보면, ‘에스원이 먼저 빌딩관리사업 인수를 검토해 에버랜드에 타진했다’는 시나리오가 적혀 있다. 증인 한씨가 작성해 에스원에 공유한 언론대응지침에는 “에스원은 미래성장전략 동력 확보 차원에서 사업 인수를 검토했고, 에버랜드는 사업 연관성이 낮은 사업을 매각할 의사가 있었다”고 되어 있었고, 실제로 이들 두 회사는 이런 내용으로 사업 양수도 배경을 설명했다.
에버랜드의 사업 개편이 연달아 이어지면서 당시 다수 언론은 ‘삼성이 일감 몰아주기 논란을 희석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삼성은 이런 의혹을 부인해왔지만, 이날 재판에서 공개된 다수 문건과 임직원끼리 주고받은 메일은 ‘진짜 사업 개편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밖에도 삼성 임직원들은 승계 관련 문건들을 메일로 주고받으며 “에이(A·이건희 회장 지칭) 보고용”, “브이시(VC·이재용 부회장) 보고”라고 명시해, 일련의 작업이 총수일가의 지시에 따라 이뤄진 것 아니냐는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한씨에 대한 검찰의 증인신문은 지난 20일에도 이어졌다. 이날 검찰 주신문에선 2014년 5월10일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이후 급박하게 이뤄진 에버랜드(이후 제일모직으로 사명 변경) 상장 작업과 제일모직-삼성물산의 합병 과정에서 있었던 합병비율 산정, 제일모직 주가 부양 의혹 등에 관한 신문이 진행됐다. 당초 이날 검찰 주신문을 마치기로 했지만, 주신문이 길어지면서 재판부는 다음달 3일 다시 한씨를 증인으로 불러 검찰 주신문을 진행할 계획이다. 변호인들은 주신문이 끝난 뒤 수회 기일에 걸쳐 한씨에 대한 반대신문을 이어간다.
신민정 기자
sh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