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달 30일 오전 전원위원회의를 열고 평등법 제정 의견표명건을 최종 의결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 팀내 가혹행위로 지난달 26일 세상을 등진 최숙현 트라이애슬론(철인3종) 선수의 가족이 마지막으로 도움을 청한 곳은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다. 경찰, 대한체육회 등을 찾은 뒤 문을 두드린 곳이다. ‘최숙현들’의 희생을 막을 ‘체육계 폭력근절안’을 인권위가 서랍 속에만 넣어두고 있던 걸 최 선수의 가족들은 알지 못했다.
7일 인권위는 묵혀온 그 권고안을 세상에 내놨다. 전원위의 의결로 이날 인권위가 발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통령이 행정수반으로서 직접 중심이 되어 국가적 책무로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끌며 오랜 기간 왜곡돼온 스포츠계 폭력적 환경과 구조를 변혁해줄 것을 권고하기로 결정했다.” 인권위가 체육계 폭력 문제를 두고 대대적 직권조사를 마무리한 지 반년여 만이다.
‘대통령에게 권고한다.’ 그 한마디의 결정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인권위는 많은 길을 에돌아갔다. 지난해 12월 전원위는 ‘대통령에게 체육계 폭력 근절을 위한 독립적 조사기구 설치를 권고한다’는 안건을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그 뒤 반년 동안 권고안을 묵힌 건 ‘보완할 대목이 많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심지어 최 선수가 숨진 뒤에 열린 전원위 회의에서조차 ‘대통령 권고안’은 인권위가 작성한 초안이 아니었다. 이날 애초 전원위원들에게 제공된 의결안엔 대통령에겐 ‘권고’보다 효력이 약한 ‘의견 표명’을 하자는 취지의 수정안이 담겨 있었다. ‘의견 표명’은 이행 여부를 점검하지 않아 실효성이 없다.
그런데 오후 4시에 시작된 전원위 회의가 막바지에 다다른 저녁 늦게야 인권위는 한 장짜리 ‘변경안’을 다시 전원위원들에게 가져왔다고 한다. 대통령에게도 의견 표명 대신 ‘권고’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한겨레>가 관련 내용을 취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권위가 알고 난 뒤에 일어난 변화다. 인권위의 미온적 대책이 대외적으로 알려질까 부랴부랴 문구를 바꾼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그나마 돌고 돌아 최종 의결된 권고안도 원안에 못 미친다. ‘독립적인 조사기구’라는 초안은 ‘대통령이 전면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이끌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선언으로 후퇴했다.
인권위는 이날 전원위의 권고안을 기자들에게 전하며 “최숙현 선수의 비극적인 피해에 보다 더 넓고, 적극적으로 살피지 못한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혔다. 인권위의 반성은 또 한 선수의 희생 앞에서 무미건조하게 들린다. 인권위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되새겨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배지현 ㅣ 사건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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