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고질적인 ‘체육계 폭력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대대적인 조사에 나섰던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위원장 최영애)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체육계 인권보호를 위한 독립적인 조사기구를 꾸리라고 권고하기로 결정했다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권고를 반년 동안 묵힌 것으로 확인됐다. 인권위가 제때 권고에 나섰다면 소속팀 관계자들의 가혹행위로 지난달 세상을 등진 최숙현 트라이애슬론(철인3종) 선수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6일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인권위는 지난해 12월 전원위원회를 열어 ‘독립기구를 만들어 신고와 처벌을 강화하자’는 취지의 체육계 폭력 근절 방안을 대통령과 관련 부처에 권고할 것을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지난해 초 조재범 전 쇼트트랙 대표팀 코치의 선수 상습 성폭행 의혹 등이 불거진 뒤 인권위는 범정부 차원의 스포츠인권특별조사단을 꾸린 바 있다. 당시 조사단은 대통령이 나서야 체육계 폭력을 근절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인권위는 이 권고안을 ‘미세문구 조정’을 이유로 반년 넘게 묵혀뒀다가 6일에야 전원위를 열어 재상정했다. 통상 전원위 결정부터 기관 권고까지 길어야 3개월가량 걸리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이례적이다. 이미 전원위 결정이 나온 권고안을 재상정해 의결하는 것도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인권위 사정을 잘 아는 관계자는 “권고안에 일부 오류가 있다면 정정 절차를 거친 뒤 바로 권고에 들어가야 한다. (권고를 미룬 것은) 법원이 이미 선고를 해놓고 내용이 바뀌었으니 다시 판결하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또다른 관계자도 “전원위가 결정을 내린 사안을 다시 논의하는 것 자체가 인권위의 존재 이유를 흔드는 일”이라고 말했다. 인권위 쪽이 권고안 공표를 반년간 보류하고 재상정에 나선 데 석연치 않은 배경이 있다는 의혹이 나오는 이유다.
인권위 안팎에선 전원위의 주심을 맡은 최영애 위원장이 청와대와 문화체육관광부 사이에서 지나치게 정치적 고려를 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된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복수의 관계자들은 “조사기구를 문체부 직속으로 두고자 하는 문체부와 정치권에 인권위가 입장을 강하게 어필했기 때문에 정무적 판단이 작용했을 걸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대적인 조사에도 불구하고 인권위 권고가 이뤄지지 않아 최숙현 선수가 숨지는 등 체육계에서 또다른 희생자가 나왔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한 인권위 내부 관계자는 “절차대로 인권위가 권고에 나섰다면 최 선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최 선수가 저렇게 희생됐는데 이제 와 ‘뒷북’ 권고가 아닌가. 여러 관계 부처 중 누가 최종 책임을 지겠나”라고 말했다. 6일 전원위 회의에서도 “빨리 대책을 발표했으면 최숙현 선수 사건을 막을 수 있지 않았겠냐”는 의견을 여러 위원들이 냈고 대체로 공감하는 분위기였던 걸로 전해졌다.
이런 지적에 대해 인권위 홍보팀 관계자는 “당시 불확실하거나 포괄적인 내용이 있어서 보완하고 구체화하다가 검토 시간이 6개월 정도 걸린 것이다. 통상 3개월이 걸리지만 이번엔 보완할 사항이 많아서 오래 걸렸다”고 해명했다.
배지현 박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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