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오후 인천 미추홀구 주안동 한 다가구주택에서 지윤(왼쪽)씨와 네 동생이 함께 방에 앉아 있다. 인천/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불안했다. 머릿속에서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불안함은 자해로 이어졌다. 지윤(가명·23)씨는 습관적으로 두 손등을 번갈아가며 꼬집어댔다. 손톱만한 멍이 생겼고 가끔은 살이 벗겨져 피가 났다. 반복된 자해로 상처는 3개월 동안 계속됐다.
흉터는 지윤씨 어머니인 박은주(가명·45)씨의 양팔에도 남아 있었다. 지윤씨의 새아버지인 고영식(가명·59)씨는 억지로 박씨에게 마약을 투약했다. 야윈 팔목에 주삿바늘 흉터가 생겼다. 새아버지가 남긴 상처는 지윤씨와 어머니를 비롯해 동생 넷 모두에게 남아 있다.
“제 인생을 이렇게 만든 게 너무 싫어요. 너무 싫어요.” 새아버지를 향한 원망에 몸서리치며 지윤씨가 말했다. 어머니의 재혼 전에도, 지윤씨 가족이 평탄한 길을 걸었던 건 아니다. 6살 터울의 둘째 동생 다은(가명·17)양은 3살 때 백혈병에 걸렸다. 10년 넘게 서울의 병원을 오가며 다은양을 돌보는 어머니도 서울에서 살다시피 했다. 지윤씨는 어머니를 대신해 동생들을 돌봤다.
다행히 다은양의 항암치료는 성공적이었다. 언제 재발할지 모르지만 동생은 건강을 회복했다. 가족의 앞날에 햇빛이 들까 할 때, 친아버지가 바람이 났다. 부부는 이혼을 결정했다.
어머니가 새 사람을 만난 뒤 잠시 삶은 자리를 잡는 듯했다. 2012년 넷째 동생인 예나(가명·7)양이 태어나자 어머니는 새아버지와 결혼했다. 가족들이 새아버지가 있는 충북 충주 집으로 하나둘 이사를 했지만 지윤씨는 제천의 이모 집에 얹혀살며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때까지만 해도 은행 대출로 먹고살았어도 애기들 과자 정도는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었죠.” 지윤씨가 돌이켰다.
새아버지는 조그만 건설 회사를 운영했다. 사업은 점점 기울었다. 펜션을 운영하던 어머니 혼자 생계를 꾸리다시피 했지만 손님은 점점 줄었다. 지윤씨는 주말마다 예식장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막냇동생 지한(가명·4)군이 태어났다. 등록금을 낼 여력이 없었다. 지윤씨는 간호사의 꿈을 접고 가족이 있는 충주로 향했다.
겨울에는 펜션에 손님이 없었다. 지윤씨는 자동차 부품 공장에 나가기 시작했다. 월 150만원을 벌었지만 돈은 모이지 않았다. 새아버지의 사업은 엉망이었다. 고씨는 어느 날 갑자기 차를 가져와서 지윤씨에게 “할부는 네가 내라”고 했다. 새아버지의 경영은 엉망이었다. 소득세 신고를 몇년간 하지 않아 ‘세금 폭탄’을 맞을 정도였다. 새아버지는 어딘가 얼이 빠진 사람 같았다. 지난해 5월 들어 일이 터졌다.
“너희 아버지가 마약을 하는 거 같다. 도망가자.” 엄마는 어느 날 말했다. “보증금이 부족하면 월세라도 얻어서 도망가자”고도 했다. 지윤씨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부모님끼리 싸웠는데 그냥 이러다가 풀어지겠지 했죠.”
어머니가 다시 지윤씨에게 “경찰에 자수를 하자. 옆에 있어달라”고 할 때 그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새아버지가 이미 어머니에게 마약을 강제로 투약한 상태였다. 어머니는 자신이 마약을 투약받은 사실도 함께 자수했다. “엄마가 가자고 하니까 같이 갔죠. 남편 후배가 계속 마약을 팔러 온다고 엄마가 말해서 경찰 조사가 이어졌어요. 근데 뭘 잘못 눌렀는지 어머니 휴대전화가 새아버지랑 통화 중인 상태였던 거예요. 조사 내용을 다 듣고 새아버지가 도망을 갔어요.” 그때부터 지윤씨의 삶은 급격히 뒤틀리기 시작했다.
경찰은 아버지가 해를 끼칠 수 있다며 임시 숙소를 마련해줬다. 그러나 엄마가 운영하던 펜션이 문제였다. 손님이 와 있는데 신경을 안 쓸 수는 없었다. 지윤씨와 어머니는 막냇동생을 데리고 펜션에 갔다. 새아버지가 마침 기다리고 있었다. 막냇동생과 잠시만 놀고 오겠다던 새아버지는 그대로 동생을 데리고 도망쳤다. 마약 소지와 투약 혐의를 받는 새아버지에게 ‘유괴’라는 새로운 혐의가 추가됐다.
어머니가 설득해 새아버지와 만난 자리엔 형사들이 숨어 대기했다. 차에 타고 있던 새아버지는 경찰의 존재를 눈치채고 그대로 시동을 걸어 도망쳤다. 어머니는 막냇동생을 내놓으라며 차에 매달렸다. 새아버지는 차를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의 골반이 부러지고 충격으로 기억까지 잃게 됐다. 이틀 뒤, 한 주민이 벌거벗은 아이가 집에 찾아왔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막냇동생은 그렇게 가족의 품에 다시 돌아왔다. 새아버지는 도주 끝에 지난해 7월, 경찰에 잡혔다. 어머니는 강제 투약인 점을 고려해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어머니는 새아버지의 선처를 바라며 없는 살림에 변호사를 둘이나 선임했다. 지난해 9월 집행유예로 나온 새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또다시 강제로 마약을 투약했다. 박씨는 두 손을 떨며 말했다. “당시 정신을 잃었어요. 양손에 마약을 투약했어요. 몇번이나 강제로 투약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새아버지는 어머니가 마약을 했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어머니는 결국 지난해 10월 말 구속됐다. 새아버지는 자신이 정보통 노릇을 하며 다른 투약자도 찾겠다고 경찰을 설득하기까지 했다. 가족 모두 사용하는 냉장고에 마약을 뒀던 새아버지는 소변 검사를 하는 주에만 교묘하게 마약 투약을 하지 않는 식으로 모두를 속였다고 한다. 올해 초 구속돼 3년 구형을 받은 새아버지는 곧 선고를 앞두고 있다.
지난달 26일 오후 인천 미추홀구 주안동 한 다가구주택에서 지윤씨가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다. 인천/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새아버지가 지윤씨 가족에게 남긴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다. 새아버지는 어머니를 수시로 때렸다. 고막이 터지고 코가 부러질 정도였다. 셋째 동생 지후(가명·15)군도 어머니를 때리지 말라며 새아버지를 막다가 수차례 맞았다. 새아버지는 올해 4살이 된 막냇동생에게까지 욕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발달장애 증세를 보인 막냇동생은 지난해까지 분유를 못 떼고 말도 못했다. 새아버지는 자신이 진행하던 공사 인건비를 아낀다면서 밤에 갑자기 둘째 동생과 셋째 동생에게 ‘공구리’를 치라며 공사현장으로 보낸 적도 있다. 올해 7살이 된 예나양도 새아버지의 폭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새아버지는 친딸인 넷째 동생에게 성폭력을 저질렀다. 알고 보니 새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하기 전 다른 사람과 결혼 뒤 낳은 친딸에게도 성폭력을 저지른 전력이 있었다. 지윤씨가 직접 새아버지를 고소했지만 “어린아이 진술이 전부라 신빙성이 없다”며 증거 불충분으로 올해 초 무혐의 처분이 났다. 넷째 동생은 하루에도 몇번씩 울었다. 우울증까지 걸린 넷째 동생은 주변 도움으로 심리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심리 치료 때 그린 가족 그림에는 새아버지가 없다.
아버지를 피해 지윤씨와 동생 넷은 이모의 도움을 받아 지난해 10월 말 인천 모처로 이사했다. 올해 초 구속되기 전, 새아버지가 어떻게 알았는지 인천 집에 찾아왔다. ‘에스오에스’(SOS) 버튼을 누르면 경찰이 출동하는 시계형 호출기도 받았다. 지윤씨는 새아버지를 피해 다시 이사했지만 새아버지는 지윤씨 가족을 놓아주지 않았다. 지윤씨를 아동학대와 횡령 혐의로 고소한 것이다. 어머니와 둘째·셋째 동생, 외할아버지·외할머니와 이모도 아동학대와 특수절도 등으로 고소당했다. 고소 탓에 지윤씨는 올해 들어 검찰 조사만 10번 넘게 받았다. 손등을 뜯기 시작한 것도 그때 즈음이다. 매일 악몽도 꿨다. “길을 걷는데 새아버지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저를 칼로 찌를 때도 있었고 목을 조를 때도 있었어요. 잘 때마다 쫓기는 꿈을 꿨던 거 같아요.” 다행히 가족 모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계속된 지윤씨의 탄원으로 어머니도 집행유예를 받아 4월 인천으로 왔다.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온 뒤 지윤씨는 9월부터 반도체 공장에 나가기 시작했다. 공장에서 받는 월급은 190만원 남짓. 어머니가 식당에서 비정기적으로 일해 버는 돈 100만원을 합쳐도 여섯 식구가 쓰기에 모자란다. 특히 한창 클 나이인 동생들의 식비가 많이 든다. “동생들이 학교랑 유치원 다녀오면 쉴 새 없이 먹더라고요. 1년 만에 저보다 키가 커진 셋째 동생은 진짜 많이 먹어요. 애들한테 먹는 걸 조금씩 줄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지윤씨 이름으로 잡혀 있는 빚 3천만원도 문제다. 지난해 초, 새아버지가 지윤씨 명의로 돈을 빌려 건축 자재를 구입한 탓이다. 생활비가 모자라 이자도 못 내고 있다. 이자가 하도 밀려 카드 회사에서 지윤씨를 상대로 법적 조처까지 들어갔다. 2년 뒤 집 계약 기간이 끝나면 어떻게 할지도 막막하다. 현재 사는 집의 보증금은 한 복지재단의 도움을 받아 충당했지만, 지윤씨는 계약이 끝난 뒤 다른 집을 구하려 한다. 최대한 이 지역에서 멀리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새아버지가 출소한 뒤 지난번처럼 찾아올까 두렵다.
그사이 지윤씨의 원래 꿈인 간호사는 잊힌 지 오래다. 백혈병에 걸린 둘째 동생 때문에 간호사가 되고 싶었냐는 물음에 지윤씨는 웃으며 단호하게 “아니요. 사람 몸 어디가 아픈지 잘 아는 게 멋있어 보이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지윤씨는 최근 본 영화 <82년생 김지영>에 나온 김지영의 어머니 미숙에게 특히 공감했다. 선생님의 꿈을 포기하고 오빠 학비를 벌기 위해 미싱 공장을 다닌 미숙과, 간호사의 꿈을 포기하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반도체 공장을 다니는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간호사를 준비하기에는 너무 늦은 거 같아요. 공장 2년 정도 다닌 뒤에는 다른 자격증을 따볼까 생각 중이에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생각으로 이 모든 걸 견뎌왔다는 지윤씨. 자신의 꿈은 지나가지 않게 잡을 수 있을까.
한겨레 나눔꽃 캠페인 참여
지윤씨네 가족에게 도움을 주시려는 분은 계좌로 후원금을 보내주시면 됩니다.(기업은행 148-013356-01-136 예금주: 대한적십자사) 대한적십자사 누리집(www.redcross.or.kr)과 네이버 해피빈(happybean.naver.com)에서도 후원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방식의 지원을 원하시는 분은 대한적십자사(1577-8179)로 문의해주십시오. 모금에 참여한 뒤 대한적십자사로 연락 주시면 기부금 영수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목표 모금액은 1000만원입니다. 후원금은 지윤씨네 가족의 생계비와 교육비로 사용되며, 1000만원 이상 모금되면 지윤씨네 가족처럼 어려운 사연의 가정에 지원됩니다.
보도 이후…
<한겨레>와 굿네이버스가 함께한 ‘나눔꽃 캠페인’을 통해 준서·사랑이네의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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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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