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립유치원 원장이 아이들 밥 먹일 돈으로 명품 가방을 샀다니요. 아이들한테 써야 할 돈으로 노래방이나 숙박업소를 가고, 심지어 성인용품까지 샀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죠.”
경기 고양시 일산에서 7살 아이를 키우는 임아무개씨는 14일 “유치원 운영비뿐 아니라 정부가 사립유치원에 지원하는 돈도 결국 다 학부모들이 낸 것 아니냐. 이렇게 다양하고 심각한 비리가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변 학부모 모두 난리가 났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지난 11일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최근 5년간 전국 시·도 교육청이 2천곳에 가까운 사립유치원에서 5천건이 넘는 비리 혐의를 적발했다는 사실을 공개한 뒤, 유치원 학부모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는 ‘후폭풍’이 더 거세지는 분위기다. 청와대 게시판과 유치원 학부모가 주로 활동하는 인터넷카페 등에서도 “아이가 맨 처음 바깥생활을 하게 되는 유치원이 부도덕과 비리로 가득한 곳이면, 아이들에게 무슨 밝은 미래가 있겠느냐”며 사립유치원 감사 강화와 비리 관련자 처벌 요구가 잇따르고 있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달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 곪은 문제…“터질 게 터졌다” 그동안 곪아온 사립유치원 문제가 이번에 공개되자 교육계 안팎에선 ‘터질 게 터졌다’는 의견이 많다. 실제 사립유치원 비리는 시·도 교육청이 간헐적으로 감사 결과를 내놓을 때마다 여러 차례 논란이 일었다. 2013년 부산·대구·인천·대전 교육청의 ‘사립유치원 지원관리 및 운영실태 특정감사’ 결과를 취합해 발표했을 때는 ‘유치원 불법매매’와 ‘원장 자격증 불법 대여’ 사실 등이 드러난 바 있다. 일부 유치원은 시교육청이 유아 학비로 지원한 7천여만원을 유치원 인수자금으로 불법 사용하는가 하면, 이 과정에서 허위 증여계약서도 등장했다. 설립자나 원장을 ‘교사 명단’에 올려 거액의 처우개선비를 부당하게 수령하기도 했다.
당시 교육과학기술부(현 교육부)는 비리 관련자 21명을 징계하는 데 그쳐 ‘솜방망이 처분’ 논란이 있었지만, 그나마 이때가 사립유치원 첫 감사였다. 2016년 경남도교육청이 자체 발표한 ‘사립유치원 회계실태’를 보면, 유치원 운영비로 개인 차량 수리비 수천만원을 쓰고, 남편 소유의 토지에 자연생태학습을 간다는 명목으로 6천만원대 이용료를 지급했다가 적발됐다.
■ “관리·감독에 줄기찬 집단 저항” 사정이 이렇지만 사립유치원들은 관리·감독이 강화되려 할 때마다 막강한 지역사회 영향력 등을 바탕으로 극렬히 저항해왔다. 실제 전국 사립유치원 운영자·원장들의 협의체인 한국유치원총연합회는 지난 5일 국회에서 열린 ‘유치원 비리 근절을 위한 정책 토론회’를 막으려고 현장에서 집단행동에 나서기도 했다. 사립유치원 통제나 감사를 강화할 때마다 국회와 교육부, 시·도 교육감 등을 상대로 줄기차게 로비를 벌인 정황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번에 자료를 공개한 박용진 의원은 “유치원 원장들이 한곳에서 장기간 유치원을 운영하면서 지역 영향력이 상당한데다, 각종 선거에서 유권자인 학부모들에게 ‘갑’의 위치에 있는 경우가 많아 선출직 공무원들도 꼼짝 못 하는 일이 다반사”라고 지적하며 “(사립유치원 비리를 공개하는 것이) 벌집을 건드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털어놨다.
전국 사립유치원 전부를 관리·감독하는 시·도 교육청의 감사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경기도교육청은 지난 3년6개월 동안 꾸준히 도내 사립유치원 감사를 진행했지만 전체 유치원의 10%도 감사를 마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 “회계시스템 도입 등 대책 시급” 2조원대 누리과정 지원금이 투입되는 전국 사립유치원에서 대규모 비리 혐의가 드러나면서, 교육계 안팎에선 이들의 회계 부정을 원천 차단할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대부분 유치원들은 다음주부터 내년 신입생 입학설명회를 연다. 이미 비리 사립유치원의 실명이 일부 공개된 터라, 학부모들로서는 교육부 대책 발표에 따라 유치원 선택이 달라질 수도 있다.
교육계에서는 사립유치원 비리의 핵심인 회계 문제와 관련해 현재 국공립 유치원이 활용하는 학교회계시스템 ‘에듀파인’을 사립에도 똑같이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소규모 사립유치원은 시스템을 따로 관리할 인력이 없어 별도 회계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주로 문제가 된 중·대형 사립유치원 관리는 가능하다는 견해가 많다. 설립자나 원장의 사적 경비 지출을 막기 위해 법인카드 사용을 의무화하거나, 누리과정 지원금을 횡령하면 전액 국고 환수 뒤 고발 조처하는 방안도 제기된다.
비리 사립유치원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시·도 교육청의 감사로 비리가 드러난 유치원은 실명 공개를 의무화하고, 현행 누리과정 ‘지원금’을 ‘보조금’으로 변경해 이를 유용하면 횡령죄를 적용해 처벌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 밖에 유치원 누리집에 예·결산을 의무 공개하고, 학부모들이 유치원 운영위원회나 급식소위원회에 참여하는 통로를 보장해 학부모에 의한 ‘일상적인 점검’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온다.
정인숙 경기도교육청 시민감사관은 ‘유치원 비리 근절을 위한 정책 토론회’에서 “현재 사립유치원 비리가 드러나면 설립자가 부정하게 집행한 금액만큼 유치원 교비회계로 채워넣으라는 ‘보전 조처’를 하는데, 유치원으로서는 ‘이쪽 주머니에서 저쪽 주머니로 옮겨넣기’에 불과한 허술한 대책”이라며 “비리를 막을 법 개정뿐 아니라 아동수당이나 학급운영비 등을 통합해 학부모에게 직접 지원하는 등 다각적인 방안이 검토돼야 한다”고 말했다.
■ 교육부, 어떤 대책 내놓을까 교육부는 늦어도 다음주 안에 사립유치원 회계·감사 시스템 투명성 강화를 뼈대로 한 ‘사립유치원 종합대책’을 발표한다는 방침이다. 회계관리 시스템을 포함해 인사·운영 비리 문제에 대한 방안도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사립유치원 회계 투명성을 확보할 시스템을 올해 안에 구축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설세훈 교육부 교육복지정책국장은 “사립유치원이 대형부터 ‘1인 유치원’ 수준의 소규모 형태도 있어 이들 전체를 아우를 회계시스템과 대책을 마련하는 데 시간이 필요한 게 사실”이라면서도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로 학부모들의 우려가 커진 만큼 단기 대책과 중장기 대책을 구분해 최대한 이른 시일 안에 공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홍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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