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18일 오전 국정원의 해킹 프로그램 구입 관련 내용이 포함된 유서를 남기고 숨진 국정원 직원 임아무개(45)씨의 승용차가 발견된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화산리 야산 입구. 임씨는 운전석에서 번개탄을 피워 숨진 채 발견됐다. 용인/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국가정보원 민간인 해킹 의혹 사건’과 관련해 유서를 남기고 마티즈 차량에서 숨진 채로 발견된 국정원 직원 임아무개(당시 45살) 과장의 유족이 사건 발생 2년이 지나 뒤늦게 ‘타살 의혹’을 제기해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 임 과장의 아버지 임희문(80)씨는 12일 시비에스(CBS)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아들의 얼굴에 상처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놀랐다. 이런 자살은 없다”며 타살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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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임 과장이 연루된 이탈리아 해킹프로그램(RCS, 원격 제어 시스템)을 이용한 민간인 사찰 의혹은 국정원 적폐청산티에프(TF)가 재조사 방침을 밝힌 13개 조사 항목에 포함돼 있어 철저하고 광범위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2년 전 수많은 의혹이 제기됐음에도 단순 자살로 종결됐던 국정원 마티즈 사건을 다시 들여다봤습니다.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 인사들이 2015년 7월14일 국회 앞에서 국정원 해킹 감청프로그램 사용 사이버사찰 진상조사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 악명높은 해킹업체 정보 유출에서 시작
국정원 팀장급 간부인 임 과장은 2015년 7월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탈리아 해킹팀 정보 유출사건’의 중심에 있던 인물입니다. 당시 이탈리아의 IT 개발 업체 ‘해킹팀’의 내부 정보가 다른 해커에 의해 인터넷에 뿌려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업체는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몰래 들여다볼 수 있는 해킹프로그램을 개발해 각국에 비밀스럽게 판매하는 곳이었습니다. 거래내용 유출로 각국 정보기관들이 해킹프로그램을 구입해 불법적으로 사용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세상이 발칵 뒤집힙니다. 예컨대 유엔으로부터 무기 금수 조처를 받은 수단이 이 프로그램을 이용해 유엔 평화유지군을 해킹하려 했던 정황이 드러난 것입니다.
한국의 국정원도 2012년부터 해킹팀의 고객이었습니다. ‘5163부대’란 대외용 명칭을 사용해 여섯 차례에 걸쳐 약 9억원을 들여 해킹프로그램을 구입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특히 한국산 스마트폰과 카카오톡 해킹을 문의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정원이 이 프로그램을 악용해 2012년 대선에 개입하고 정부에 비판적인 인사들을 사찰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거세게 일었습니다. 국정원은 “대북 감시용” “연구용”이라며 불거진 의혹을 전면 부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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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일파만파로 번지면서 이 프로그램의 구매를 담당한 인물인 임 과장에게로 시선이 쏠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해 7월18일 낮 12시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화산리의 한 야산 중턱에 세워진 자신의 빨간색 마티즈 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됩니다.
경찰과학수사대 직원이 2015년 7월19일 오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용인동부경찰서에서 ‘국정원 직원 변사사건’ 관련 수사사항 브리핑이 끝난 뒤 변사체로 발견된 국정원 직원의 유서 원본 중 일부를 공개하고 있다. 용인/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 사망 전 자료 삭제…이례적인 ‘국정원 직원 일동’ 성명
임 과장은 발견 당시 운전석에 앉아 숨져 있었으며, 조수석 앞과 뒷좌석에는 번개탄이 발견됐습니다. 승용차 조수석에는 A4용지 크기의 노트에 자필로 쓴 유서 3장이 놓여 있었습니다. 유서에는 부모와 가족, 국정원에 전하는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국정원 앞으로 남긴 유서엔 “(저의) 지나친 업무에 대한 욕심이 오늘의 사태를 일으킨 듯합니다. 정말 내국인에 대한, 선거에 대한 사찰은 전혀 없었습니다. 외부에 대한 파장보다 국정원의 위상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혹시나 대테러, 대북 공작활동에 오해를 일으킬 지원했던 자료를 삭제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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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사찰 등 불법이 없다면서 자료는 왜 삭제했을까요? 세상을 등지는 그 순간에 말이죠. 임 과장의 바람과는 달리 국정원 해킹사건에 대한 의혹은 더욱 커졌습니다. 여론이 들끓자 국정원은 유서를 공개한 데 이어 ‘직원 일동’ 명의의 이례적인 성명을 발표합니다. “(임 과장이) 국정원의 공작 내용이 노출될 것을 걱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자의대로 이를 삭제하고 그 책임을 자기가 안고 가겠다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서를 글자 그대로 믿으라는 국정원 직원 일동의 성명도 의혹을 더욱 부추길 뿐이었습니다.
■ 연탄가스 속에 가려진 수많은 의문들
사건의 정황들이 온통 석연치 않았기에 세간에는 수많은 의문이 제기됐습니다. 차량이 발견된 곳을 향하는 도로에서 찍힌 마티즈 차량의 번호판 색깔이 다른 점, 국정원 직원이 경찰보다 빨리 현장에 도착한 점, 현장 기록 구급차 블랙박스에서 28분 분량의 영상이 사라진 점, 마티즈의 빠른 폐차 등 의문은 계속됐습니다. 관련 자료를 지워버렸다는 유서 내용 역시 증거인멸 시도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정보기관 직원이 단순히 ‘딜리트 키(Delete Key)’로 자료를 삭제한 뒤 자살했다고 국정원이 밝힌 점도 온갖 의구심을 낳았습니다. ‘딜리트 키’로 삭제되었다면 자료 복구에 몇 시간밖에 걸리지 않을 텐데 국정원은 일주일이나 걸린다며 시간을 끌었습니다. 국정원 출신 국회의원들까지 나서 제3자에 의한 진상조사를 필사적으로 막았습니다.
여러 의문은 풀리지 않았는데 경찰은 그해 10월20일 사건 발생 94일 만에 사건을 종결합니다. “불거진 의혹은 많지만 조사 결과를 보면 단순 자살이 명백했다”는 것입니다.(
▶관련기사: 차안서 숨진 국정원 직원 사건…‘단순자살’로 종결) 하지만 유족들은 달리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임 과장 사망 2주기 즈음에 그의 부친이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아들의 마지막 모습이 자살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이지요. 타살에 더 무게를 싣는 것 같습니다. 왜 당시에는 말하지 못했을까요? 임 과장 부친의 말을 종합하면, 당시 육사에 재학중이던 손녀(임 과장의 딸)에게 불이익이 있을까봐 걱정했고, 언론 등 외부접촉을 막은 경찰의 외압이 있었다고 합니다. 다시 불거진 의혹에 경찰청 쪽은 “국과수 부검 결과는 일산화탄소로 인한 질식사이다. 얼굴 상처는 고인이 의식을 잃은 뒤 차 안에 피워놓은 번개탄 쪽으로 얼굴과 몸이 쓰러져서 화상을 입은 것이다. 얼굴의 상처는 고려할만한 사인이 아니라고 부검 보고서에 써있다. 당시 유족도 부검에 참여했었다”고 해명했습니다. <한겨레>는 임 과장의 부친에게서 직접 듣기 위해 인터뷰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국정원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국정원이 주도·관여한 정황이 있는 13건의 정치공작 의혹에 대한 재조사 방침을 천명하면서 국정원 마티즈 사건과 관계있는 ‘이탈리아 해킹프로그램을 이용한 민간인 사찰 의혹’도 재조사할 방침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번 국정원 조사에서 연탄가스 속에 2년간 가려져 있던 국정원 해킹사건과 유족의 억울함이 밝혀질 수 있을까요. 다른 12건의 진실도 빛을 볼 수 있을까요? 김미영 허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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