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레일리아(호주) 스탠소프의 에스에스아르 농장에서 한국 청년들이 딸기 모종 관리를 위해 대형 트랙터에 연결된 베드머신에 엎드려 잡초를 제거하고 있는 모습. 에스에스아르 농장 한국인 워홀러 제공
[더불어 행복한 세상]
취업난에 저임금·중노동 ‘좌절’
한국 떠나는 20대들 ‘희망 난민’ 선우·정환씨는 ‘워킹 홀리데이 메이커’(워홀러)로 호주에 왔다. 지난해 6월부터 워홀러로 지내는 선우씨는 “호주에서 비자가 만료되면 캐나다, 뉴질랜드 등을 돌면서 워홀러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정환씨는 2014년 1월 호주로 왔다. 이미 워홀비자를 1년 더 연장했다. 전문대를 졸업한 그는 “한국에선 뭘 좀 해보려고 해도 학벌 등의 벽이 너무 높더라. 호주에 정착하거나 필리핀에 가서 사업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스탠소프에는 ‘농장을 타는’ 한국 청년들이 적지 않다. 마을 중심가에 한인 식당이 있을 정도다. 워홀러끼리는 ‘농장을 탄다’는 말로 서로 통한다. 워홀비자로는 한 곳에서 6개월밖에 일할 수가 없는데다 농장마다 작물 수확 시기가 달라서 여러 곳을 옮겨다닌다는 의미다. <한겨레>는 지난달 14~19일, 호주 시드니와 브리즈번, 코프스하버, 스탠소프 등에서 20~30대 한국 청년 15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탈조선’에 나선 경우였다. 지난해 탈조선은 대한민국을 지옥으로 부르는 ‘헬조선’과 함께 한국을 떠나고 싶은 청년층의 심리를 대변하는 신조어로 자리잡았다. 청년들이 한국을 떠나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일이 아주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하지만 서울연구원 의뢰로 하자센터와 함께 ‘탈조선’에 대해 연구 중인 강정석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 사무국장은 “1950년대 이후 ‘파독 광부’ 등 국가의 기획 아래 선진국으로 떠나거나 1990년대 이후 글로벌 진출이 화두가 되면서 전문 역량을 키우는 차원에서 떠났던 경향과는 다르게, 최근 들어서는 한국에서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서 벗어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심정적 난민’이 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청년들이 탈조선을 희망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한국에서 국가나 시장의 기획이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더 이상 희망을 찾기 어려운 한국에서 벗어나 새로운 희망을 찾아 나섰다는 점에서 호주에서 만난 청년들은 ‘희망 난민’인 셈이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새 희망 찾는 ‘심정적 난민’ 호주는 청년층이 비교적 수월하게 떠나올 수 있는 ‘기회의 땅’이다. 한국은 1995년 만 18~30살 청년들이 호주에서 1년 동안 여행과 취업, 어학연수 등 워홀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호주 정부와 협정을 맺은 바 있다. 별도로 비자 허용인원(쿼터)을 제한하지도 않았다. 일정한 요건을 갖추면 1년간 추가로 비자를 연장(세컨드 비자)할 수도 있다. 6년간 다섯곳 직장 다닌 인영씨
“한국선 실력만큼 인정 못받지만
호주선 쉴 수도, 돈도 많이 벌어” 직장 그만두고 호주 온 정환씨
“호주서 돈 모은 뒤
필리핀서 미술학원 차리고 싶어” 실제로 한국 청년들은 100만원만 가져와도, 바로 일자리를 구해서 생활비를 벌 수 있다고 했다. 많게는 방 2~3개짜리 집에 16명이 살면서 주거비를 아끼기도 한다. ‘닭장 셰어’(법에서 정한 수용한도를 초과해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것)나 ‘거실 셰어’(거실에 커튼을 치고 자는 것), ‘베란다 셰어’(베란다에서 지내는 것)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정환씨는 “호주는 엑스레이 검사(신체검사)만 통과하면 올 수 있는 나라로 통한다”고 말했다. 농장일은 호주에서 세컨드 비자를 얻으려는 한국 청년들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일자리다. 호주 정부는 호주인들이 가기를 꺼리는 일자리에 세컨드 비자를 희망하는 워홀러들이 일하도록 유도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호주 농촌 등에서 농작물 재배 및 목축업, 광산업 등 특정 업무를 88일 이상 일해야 세컨드 비자를 내주도록 한 것이다. 정환씨는 한국에서의 직장생활에 넌더리를 내고 호주로 건너왔다. 한국에서는 경력이 어느 정도 쌓인 뒤에도 월 150만원 이상을 주는 곳을 찾기 어려웠다. 정환씨는 호주에서 돈을 모은 뒤 필리핀 등지에서 미술학원을 세울 계획이다. 그는 “원래 미술학원 교사가 꿈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선 지방대라도 4년제 대학을 나와야 할 수 있다. 실력이 있더라도 ‘듣보잡’ 대학을 나와서는 엄두를 못 내겠더라”고 말했다. 호주에 와서 그는 한국에서 받았던 급여의 두배가량을 번다. 호주의 최저임금은 시간당 17.29호주달러(약 1만4천원)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국(시급 5580원, 2015년 기준)의 세 배에 육박한다. 그가 건넨 지난주 ‘페이슬립’(급여명세서)을 보면, 시급 21.83달러를 받으며 주 43.75시간을 일한 내역이 적혀 있다. 세금을 제외하고 831.08달러(약 71만원)가 정환씨 통장으로 들어갔다. 언어장벽이나 한국에서는 해보지 않은 육체노동의 고단함 속에서도 ‘농장을 타는’ 한국 청년들은 당장 호주에서의 삶에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시드니에서 유학원을 운영하는 이지수 아태국제교육진흥원 실장은 “한국에서 괜찮은 일자리를 얻기 어려운 조건의 청년들이 한국에서 최저시급 5580원씩만 받다가 이곳에서는 청소일만 해도 시간당 1만원 이상을 벌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한 희열이 큰 것 같다”고 말했다. 스탠소프 구인·구직센터(워크 포스)에서 만난 황인영(28·워홀러)씨도 “그동안 다녔던 (안 좋은) 회사들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 같아서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스탠소프의 한 브로콜리 농장에 취업하기 위한 면접 인터뷰를 예약하고 오는 길이었다. 인영씨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시드니 북쪽의 코프스하버 농장에서 블루베리를 따는 ‘피커’(Picker)로 일했다. 그는 “코프스하버 쪽 작황이 안 좋아서 수확 시즌이 올해 빨리 끝났다. 갈아탈 농장을 구하기 위해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말했다. 인영씨는 한국에서 대학 졸업 이후 6년 동안 디자인, 광고, 소품업체 등 5곳의 회사를 옮겨다녔다. 월 120만~130만원을 받으면서 야근과 주말근무에 시달리는 일이 잦았다. 결국 과로와 스트레스가 쌓이면서 갑상선기능항진증에 걸렸다. 마지막으로 일한 곳에선 5개월 만에 임금이 체불됐다. 그가 월 200만원이 넘는 급여를 받은 것은 호주 농장일이 처음이다. 인영씨가 한국을 떠나온 데는, 한국에서는 자신의 실력이나 노력을 인정받으면서 일하기 어려울 것이란 불신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명문대를 나온 디자이너들은 독창적 디자인 업무를 맡기는데 나에게는 기존에 있는 디자인을 변형하는 업무만 맡기더라”고 말했다. 탈조선에 나선 한국 청년들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한때 ‘이민자의 천국’으로 불렸던 호주도 갈수록 이민법 규제가 강화되고 있다. 과거 호주에서 부족한 직업군에 대해서는 취업이민이 수월했던 데 비해, 최근 들어선 고용주가 원하는 현지 기술자격증이나 관련 경력, 영어 실력 등의 수준이 높아졌다. 호주에서도 한국 청년들의 미래는 막막하다. ‘희망 난민’의 시한은 대체로 2년(워홀비자 기한)이다. 학생비자로 체류기간을 늘리거나 영주권을 받아서 정착할 수도 있지만, 실제는 남고 싶어도 돌아가야 하는 이들이 더 많다. 한국에 돌아가도 취업은 여전히 어렵기 때문에, 호주에서 모은 돈으로 자영업을 시작하기도 한다. ㄱ씨는 호주에서 2년 동안 5만달러(약 4200만원)를 모아 한국에서 옷가게를 차렸다. “정말 악착같았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 옷가게가 잘되고 있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스탠소프/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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