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웅(28)씨는 지난해 초 호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013년 ‘워킹 홀리데이’로 왔다가 대학 졸업을 하고 다시 왔다. 이번엔 예비군복도, 아끼던 만화책도 모두 팔아치우고 왔다.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는 “치킨집을 운영하는 부모님을 도우면 별도로 알바를 고용하지 않으셔도 된다. 최소한 부모님 가게 일 돕는 것보다 더 보람있는 일을 해야 하는데, 한국에선 그럴 수 없을 것이란 불안감이 컸다”고 말했다.
‘탈조선’ 워홀러 15명
퇴근 뒤 여유로운 시간 찾아
“한국선 정신없이 일만 했구나”
청소일·타일러 보조 등 막노동
노력한 만큼 보상, 한국과 달라
“행복한 삶 살 수 있게 만들어줘”
선웅씨는 시드니의 한 비즈니스칼리지에 입학한 뒤 학생비자를 받았다. 석달에 1500호주달러(약 129만원, 2년6개월 과정)의 학비를 내지만 학교는 1~2주에 한번씩만 나가면 된다. 그는 밤에는 패러매타역 부근 오피스빌딩의 클리너(청소 노동자)로 일한다. 학생비자는 공부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워홀비자 만료 뒤에도 호주에 더 머무르기 위한 수단이다. 2년 뒤 영주권 신청이 가능한 ‘457비자’(취업비자)를 받는 게 목표다.
<한겨레>가 지난달 14~19일 호주에서 만난 20·30대 청년 15명의 ‘탈조선’ 사연은 각기 달랐지만, 거의 대부분이 한국에서의 취업난, 장시간 저임 노동, 전근대적 기업문화 등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청년들은 호주에 와서야 칼퇴근과 저녁이 있는 삶, 적정한 임금 수준 등을 비로소 알아나가는 중이었다.
■ “칼퇴근·적정임금” 시드니 근교의 한 일식당에서 일하는 정재연(28)씨는 “외국에 나와서 일하다 보니까 한국에선 정신없이 일만 했구나 싶더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재연씨는 백화점 화장품 매장 직원이었다.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하면 해당 브랜드 화장품으로 풀메이크업을 해야 했다. 창고를 오가며 물품을 나르는 일도 힘들었지만 가장 힘든 건 감정노동이었다. 고객들로부터 언어폭력을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는 “백화점 일은 끝나는 시간이 되더라도 끝나지 않았다. 집에 오면 잠만 자고 다시 나갔다. 여기서는 ‘퇴근 뒤의 여유로움’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한국에선 장시간 노동에도 월 200만원 이상의 급여를 받기 어려웠지만 이곳에선 일자리만 잘 고르면 노력한 만큼 돈을 받았다. 안철영(가명·29)씨는 브리즈번 근교의 한 쇠고기 공장에서 안창살과 토시살의 지방을 제거하는 일을 한다. 철영씨의 시급은 22호주달러(약 1만9000원)가량이다. 주 38시간 근무를 기본으로 하고, 추가로 3시간 오버타임을 하면 시급의 1.5배, 그 이상 일을 하면 시급의 2배를 받는다. 그는 “연간 7만달러(약 6000만원) 정도는 벌 수 있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는 ‘어린 막내’ 취급을 받았는데 이곳에선 그렇지 않더라. 업무능력이 좀 떨어지는 이들이 더 잘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건 있다”고 말했다.
가전·가구 배송을 하는 조상훈(29)씨는 “한국에서는 퇴근시간이 오후 6시로 정해져 있더라도 그때까지 끝낼 수 없는 분량의 업무를 준다. 여기서는 직장인들 퇴근시간이 대체로 오후 5시대가 많다는 게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한 통신회사에서 기지국 안테나 관리를 하는 인턴을 하다가 감전을 당한 적이 있다. “감전을 당해서 너무 놀랐는데 당시에 같이 일하던 선배들이 그냥 괜찮다고 하고 말더라”는 상훈씨의 목소리엔 억울함이 묻어났다.
■ “한국이 싫어서” 시드니 번화가에 있는 한 쇼핑몰 클리너인 백영희(가명·25)씨는 호주에서도 ‘한국스러운’ 자신을 발견할 때 기분이 안 좋아진다고 했다. 그는 “한국인들끼리는 누가 시급이 더 높은지를 두고 경쟁을 벌인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 호주에 왔을 때 시급 12달러 웨이트리스에서 시작해, 시급 17달러의 호텔 룸메이드(하우스키퍼)를 거쳐 현재는 시급 24달러를 받고 있다. 크리스마스에 일을 하면 시급은 48달러로 올라간다.
“다들 그런 경쟁이 싫어서 왔는데도 알게 모르게 ‘시급 경쟁’이 있다”고 그는 말했다. 보통 영어로 의사소통이 잘되는 사람일수록 높은 시급의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 일부 한국 청년들끼리는 일거리가 많고 시급이 높은 수준인 몇몇 농장을 ‘농장계의 삼성’으로 부르면서, 일자리 정보를 나누기도 한다. 농장에서 급여를 시간당(hourly)이 아닌 킬로당(contract)으로 주는 경우엔 경쟁이 더 심해진다.
영희씨에겐 ‘한국이 싫어진’ 기억들이 아직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는 1년 가까이 중소기업 비정규직으로 일했다. 아침마다 장시간 출근을 하면서 지하철이 ‘지옥철’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회사에선 점심메뉴 하나 마음대로 고를 수가 없었다. 직장 상사인 중년 남성들의 성적 농담을 듣고 있어야 했다. 8개월 만에 더 버티지 못하고 회사를 나왔다.
시드니 근교에서 타일러 보조로 일하는 라상균(39)씨는 “똑같은 건설현장에서 일해도 ‘오지’(Aussie·호주인) 밑에서 일하는 것이 한국인 밑에서 일하는 것보다 퇴근이 더 빠르다”고 말했다. 한인 업소에서는 세금을 내지 않는 대신 법으로 정해진 시급보다 낮은 수준으로 주는 일명 ‘캐시잡’(Cash Job) 일자리가 많다. 일반적으로 구직자들은 ‘한인잡’ 대신 ‘오지잡’을 선호하지만, 영어 실력이 부족한 이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 “내리고 싶은 ‘한국열차’” 대체로 영주권을 취득한 이들의 만족도는 높은 편이다. 캔버라·시드니에서 카페를 창업한 김상윤(32·영주권자)씨는 “한국에서는 누구나 필요 이상으로 열심히 일하는데도 주어지는 성과 및 보상이 부족하다. 이곳에선 노력에 따른 보상이 분명하게 주어지기 때문에 부지런한 편인 한국인들에게 유리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카페 취업을 원하는 한국 청년들을 대상으로 바리스타 교육사업도 병행하고 있다.
시드니의 한 컨설팅회사에서 일하는 전성택(31·영주권자)씨도 “아이를 낳은 이후 호주에서의 삶에 대한 만족도가 훨씬 높아졌다. 교사 1명당 아이 2명을 봐주는데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많이 부러워한다. 교육과 의료 등 복지제도에서 혜택이 큰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장기적으로도 아이를 한국에서의 경쟁 위주 입시교육 시스템에 편입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한국을 떠나온 데 후회가 없다”며 “아무래도 좀더 행복한 삶을 추구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사회에서 아이를 기르고 싶지 않겠냐”고 덧붙였다.
비교적 영주권 취득이 용이한 조건인 상균씨는 “아직 전세 개념이 남아 있는 한국과 다르게 호주에서는 주마다 집세를 내야 하니까 이곳도 생활비가 적게 들어가는 건 아니다. 다만 여기서는 기술을 배우면 임금이 앞으로 계속 오를 것이라는 미래가 보이고, 젊어서 고생하면 나이 들어서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에 그는 한국에 대해서는 “1살부터 100살까지 모든 세대가 다 살기 힘든 나라”로 규정했다.
호주에서 만난 한국 청년들은 세월호 참사 등을 예로 들면서, 정부·정치권에 대한 불신을 강하게 드러냈다. 영희씨는 “시민을 위한 정치가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을 떠난 뒤의 단상을 이렇게 전한다.
“한 세미나에서 누군가 이런 말을 하더라. 청년들에게 한국 사회가 ‘설국열차’ 같다고. 떨어진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열차 안보다 더 최악일까봐 못 떨어지고 있다고. 난 지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열차 바깥에 있는데 오히려 안도감이 크다. 아직 안 죽었고, 적어도 열차 안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시드니·브리즈번/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