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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70년이 되도록 ‘광복’에 얽매여야 하나

등록 2015-08-14 19:42수정 2015-08-15 14:15

[토요판] 박성민의 2017오디세이아
(14) 8월15일을 맞아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오늘은 광복절이다. 우리에게 광복절은 어떤 의미일까? 광복절에 대한 설명을 찾아보면 1945년 8월15일에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한 날과 1948년 8월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날을 ‘아울러’ 축하하고 기념하는 날로 되어 있다. 아울러 기념한다지만 이름만 봐도 ‘광복’을 기념하는 날임을 알 수 있다. 기념식을 하는 독립기념관과 ‘흙 다시 만져 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로 시작하는 광복절 노래에도 독립의 기쁨만 있을 뿐 건국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해방일과 같은 8월15일에 나라를 세운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생일상을 못 받는 ‘나라 생일’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알았다면 다른 날을 택했을 것이다. 다른 날이었다면 ‘건국일’이든 ‘정부 수립일’이든 큰 논란 없이 기념했을 것이다.

8월15일이 ‘1948년 건국’보다 ‘1945년 해방’이라는 의미가 더 부각된 데는 역시 ‘광복절’이라는 이름 탓이 크다. 두고두고 논란이 될 ‘광복절’이라는 이름이 태어난 배경에는 다소 엉뚱한 사연이 있다.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기념일’을 국경일로 제정해 줄 것을 국회에 요청했는데 국회가 법안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광복절’로 명칭을 변경한 것이다. 원래 정부원안에는 삼일절 3월1일, 헌법공포기념일 7월17일, 독립기념일 8월15일, 개천절 10월3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1949년 9월21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 정부원안 가운데 헌법공포기념일을 ‘제헌절’, 독립기념일을 ‘광복절’로 변경한 수정안을 본회의에 상정했다. 결국 수정안과 정부원안을 놓고 표결에 부쳐 수정안이 가결되었다. 그러니까 ‘광복절’은 국경일 명칭의 3음절 자구 통일 때문에 탄생한 셈이다. 애초에 ‘독립기념일’이 아니라 ‘건국절’로 제안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한 대목이다.

‘독립 기념’은 3·1절로 충분하다

내가 일하는 ‘민컨설팅’이 2004년 이와 관련한 조사를 한 적이 있다. 대한민국 건국일을 묻는 질문에 국민의 75%가 모른다고 답해 충격을 주었다. 중요한 국경일을 묻는 질문(복수의 답)에는 3·1절이 61.8%, 광복절 45.5%의 순서였고, 4대 국경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글날이 23.8%로 세 번째였다. 그리고 3·1절을 ‘독립선언일’, 광복절을 ‘건국기념일’, 한글날을 ‘한국문화의 날’로 바꾸자는 제안에 대해서는 72.3%가 찬성했다. 광복 60주년이 되는 2005년이면 해방으로부터 ‘충분한’ 시간이 흘렀으니 건국 60주년이 되는 2008년까지는 8월15일을 ‘건국기념일’로 바꾸는 것이 의미 있다고 본 제안이었다.

3·1절은 여러모로 ‘독립선언일’에 어울리는 날이다. 당대의 최고 문장가가 쓴 ‘독립선언문’이 있고, 유관순과 33인 등 상징적인 인물들도 있다. 전국적인 봉기로 일제 통치방식의 변화를 이끌어낸 성과도 있고 중국의 5·4운동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1919년은 상하이(상해)임시정부가 세워진 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주적 저항’이 ‘주어진 해방’보다는 더 자랑스럽고 떳떳한 것 아닌가. 그러니 독립운동과 관련한 모든 행사는 이날에 하고 8월15일에는 대한민국과 관련한 행사를 함으로써 국가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자는 취지였다. 그럴 때가 되었다고 본 것이지만 오판이었다.

60년이면 충분하다고 봤으나 70주년인 올해도 우리는 아직 일본으로부터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일제 식민 지배의 ‘정신적 외상’은 우리 민족에게 영구적 장애를 남긴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3·1절 기념사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는 것”이라며 고작 70년 정도로 씻길 상처가 아니라고 못박았다. 일본 ‘보수의 대부’인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도 “민족이 입은 상처는 3대, 100년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 생각해야 한다”며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지난 70년 동안 그랬듯이 우리는 올해도 일본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은 아베 총리가 ‘무슨 말을 할까’, ‘어디를 갈까’, ‘누구를 만날까’가 모두 뉴스가 되었다. 이제 와서 ‘아베 담화’에 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사죄’가 담긴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기존 담화를 계승했다고 “한국 외교의 승리”라고 자랑할 것인가, “이제 과거는 잊고 미래로 함께 나가야 할 때”라고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내밀 것인가, 아니면 “아쉽지만 그나마 다행이다”라고 가슴을 쓸어내릴 텐가. “일본을 되찾자”는 아베의 슬로건이 지향하는 ‘되찾고 싶은 일본’은 이제 분명해졌다. 전후 총리인 ‘요시다 시게루’가 구축한 ‘경제우선주의’와 ‘평화헌법체제’를 부정하고,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의 안보노선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2013년 아베 총리가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주이자 ‘조선 병합’을 주장한 동향의 ‘요시다 쇼인’ 묘소를 참배한 데서도 그의 생각은 분명히 드러난다. 아베가 그런 상대라면 우리가 생각을 바꿔야 한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일본은 과거와 완전히 다른 일본이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일본이 마주하고 있는 한국도 옛날의 한국이 아니다. 충돌은 피할 수 없다. 억지로 눌러온 것이 터진 것뿐이다. ‘냉전 종식’과 ‘중국의 부상’이 한-일 관계의 ‘게임체인저’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은 미국과 함께 한국에 절대적인 존재였다. 안보, 기술, 자본, 시장에서 솔직히 한국에는 미국과 일본이 전부였다. 아무리 국민의 반일 감정이 크다고 하더라도 현실 앞에서 적절하게 통제되었다. 정치인과 기업인들도 대부분 미국통 아니면 일본통이던 시절이었다.

미국의 주도하에 시작된 한국과 일본의 수교 교섭은 1965년 6월22일 도쿄에서 ‘한-일 양국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기본조약)’을 조인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 사실 인정과 가해 사실에 대한 진정한 사죄가 선행되지 않았고, 청구권 문제, 어업 문제, 문화재 반환 문제 등에서 우리의 지나친 양보가 국내에서 크게 논란이 되었다. 특히 부속협정인 ‘청구권·경제협력에 관한 협정’(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은 후에 일제강점하 피해자 보상과 위안부 보상 문제 등의 원인이 되었다. 모든 게 아쉽고 힘이 없던 시절이었다.

광복에 갇힌 정신적 외상 극복은
대한민국이 일본 넘어서는 길뿐
오늘 태어난 아기가 성인 돼서도
일본의 사죄를 요구해야 하나
일본 총리 담화 일희일비해야 하나

한일관계 악화는 중국 부상 때문
세력재편기에 빨리 움직이는 일본
이번에는 확실히 미국 편에 섰다
전략적 목표 분명한 주변 강국들
대한민국은 꿈과 전략이 무엇인가

아베는 왜 ‘일본을 되찾자’고 하나

일본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전쟁으로 무너진 경제를 되살리는 것이 급했기 때문에 그저 미국이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소련과 중국, 북한 공산세력에 가난한 독재국가 한국이 먹히면 그다음은 일본이 될 터였다. 한국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 정부는 1982년부터 시작되는 제5차 경제개발에 필요한 500억달러 가운데 100억달러를 일본한테 얻으려고 했다. 당시 한국이 동원한 논리가 ‘안보경협’이었다. 한국이 예산의 35%를 국방비에 쓰며 미국과 소련이 날카롭게 맞서는 동북아 자유진영의 보루 구실을 하는데, 이는 일본의 안보에도 기여를 하기 때문에 일본이 한국에 경제협력을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일본으로부터 40억달러를 받아냈다. 그런 논리가 통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이 북한에 먹힐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냉전이 끝난 순간 한국과 일본의 게임 룰도 바뀐 것이다. 한국에 부채의식이 있던 ‘단카이 세대’(1947~49년에 태어난 전후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도 일본의 공기가 바뀌는 데 영향을 미쳤다.

한-일 관계를 악화시킨 더 중요한 이유는 중국의 부상이다. 중국은 동아시아의 안보·경제 질서를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일본은 한-일 관계가 나빠진 이유가 한국이 “골대를 움직였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솔직한 이유는 일본에 군사적, 경제적 위협 국가인 중국과 한국이 가깝게 지내기 때문이다. 일본이 외무성 홈페이지에서 한국과 관련한 ‘우리나라(일본)와 자유와 민주주의, 시장경제 등의 기본적 가치를 공유한다’는 표현을 빼고는 군색한 변명을 했는데 아마도 “한국의 수준이 일본과 비슷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중국과 비슷하군”이라는 속마음을 반영한 듯 보인다.

역사적으로 일본은 세력 재편기에 항상 능동적으로 움직였다. 이번에는 미국 편에 확실히 섰다. 우리는 눈치를 보면서 우왕좌왕하다가 늘 화를 당했다. 명·청 교체기와 구한말에 이어 이번에도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문제는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국제 정세를 읽는 통찰력과 전략을 갖고 있느냐는 것이다. 아베의 일본은 ‘헌법 개정’을 통해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분명한 전략적 목표를 갖고 움직이고 있다. 시진핑의 중국도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의 꿈’과 신경제구상인 ‘일대일로’(육상·해상 실크로드)의 전략적 목표를 갖고 있다. 러시아의 푸틴도 ‘강한 러시아 재건’을 내걸었다. 북한의 김정은도 ‘강성대국’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사상 강국’, ‘정치 강국’, ‘군사 강국’, ‘경제 강국’의 전략적 목표를 갖고 움직이고 있다. 그런 나라들에 둘러싸인 대한민국의 꿈은 도대체 무엇이고, 전략은 무엇인가?

아베가 내세운 ‘일본을 되찾자’라는 슬로건은 외국에 대해 단호한 각오를 보여주는 ‘강한 일본’과 일본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할 수 있는 일본’을 되찾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국가를 꿈꾸는 것인가? 함석헌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했지만 나는 “꿈이 있는 국가라야 산다”고 고쳐 말하고 싶다. 어느 때부턴가 한국에서는 대통령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한국의 꿈’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나라는 지금 꿈도 없고, 전략도 없고, 논쟁도 없다. 세계 1·2·3위의 경제 강국과 세계 1·2·3위의 군사 강국, 거기다가 핵으로 위협하는 북한에 둘러싸인 한국은 뛰어난 전략으로 무장한 정치인, 군인, 외교관이 어느 나라보다 많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나라지만 위대한 전략가는 고사하고 다른 나라의 눈치나 살피는 기회주의자와 패배주의자로 가득 차 있다. 나라의 꿈도 없고, 지도자도 안 보인다.

70년이 되도록 ‘광복’에 얽매여 있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탓이다. 광복 70주년은 분단 70주년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반도가 평화적으로 하나가 되기 전에는 광복은 결코 완성될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우리가 광복이라는 과거에 매여 있을 수는 없다. 이젠 우리도 앞을 보고 걸어야 한다. 뒤를 보며 걸으면 빨리 갈 수도, 멀리 갈 수도, 똑바로 갈 수도 없다. 광복에 갇힌 정신적 외상을 극복하는 길은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일본을 넘어서는 길밖에 없다. 오늘 태어난 아이가 성인이 되어서도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고, 일본 총리의 담화 내용에 일희일비하는 나라를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

일본을 더 많이 알고 더 배워야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대한민국 건국 70주년이 되는 2018년에는 ‘건국기념일’이든 ‘정부수립일’이든 8월15일을 광복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태어난 날로 바꾸는 것이 좋다. 그리고 민족적 자존심을 위해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 3·1절에는 ‘완전한 광복’을 선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적어도 몇 가지 중요한 국가 지표에서 실력으로 일본을 넘어서야 한다. 예컨대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넘어서는 것도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 수 있다.

대한민국이 실력으로 일본을 넘어서려면 일본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하고 그들에게 더 많이 배워야 한다. “세상에서 미국 우습게 아는 나라는 북한밖에 없고, 일본 우습게 아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는 농담이 있다. 이런 태도부터 버려야 한다. 우리가 일본을 아는 것보다 일본이 우리를 더 많이 안다. 그건 정상이 아니다. 일본은 배울 태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강대국이 된 것이다. 그들은 우리보다 더 많이 ‘개방’했고 더 많이 ‘혁신’했다. 그리고 그렇게 이끈 지도자들이 있었다. ‘요시다 쇼인’과 그의 제자 ‘이토 히로부미’, 그리고 ‘후쿠자와 유키치’와 같은 메이지 혁명의 주역 모두 배우려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나라의 큰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우리도 2017년 대선에서는 한반도의 위대한 꿈과 전략을 말하는 지도자를 보고 싶다.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 1991년 설립한 ‘민(MIN) 컨설팅’ 대표. 30년간 정치를 현장에서 관찰하고 수많은 선거를 이끌었다. 전략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승리를 위한 캠페인 방법을 몸으로 익혔다. 세계 최고의 전략컨설팅 회사를 꿈꾼다.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가 민주주의라고 믿고 있다. ‘힘든 일은 있어도 나쁜 일은 없다’는 인생관으로 버틴다. 책과 영화, 커피를 사랑하며 걷는 것을 즐긴다. ‘2017 오디세이아’를 통해 차기 대선을 향한 여정을 독자들과 함께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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