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가 길고 깊었다. 북조선의 간첩과 남한의 국정원을 그동안 몰라도 너무 몰랐구나 하는 깨달음을 요즘 얻게 됐다. 이병호 국가정보원장이 14일 국회 정보위원회에 출석해 한 말이 계기가 됐다. 이탈리아 해킹업체로부터 RCS(리모트컨트롤시스템)라는 걸 사들였다고 당당하게 인정하는 순간 ‘냉혹한 스파이의 세계’는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민간인 사찰이 아닌 해외 북한 공작원 감청을 위해 구입했다”는 해명을 듣자 모든 것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이병호 원장의 말을 한 번 믿어보자. 그리고 남북한 스파이들의 행태를 쫓아가 보자.
■ 찌질한 간첩
이병호 원장의 설명에 따르면, 국정원이 해킹한 사람들은 다 해외에서 활동중인 북한 공작원들이고 그 가운데는 북한의 무기 거래상도 포함돼 있다고 한다. 우리는 무기 중개상 ‘린다 김’을 통해서 이 바닥의 생활을 어느 정도는 안다. 세계적인 휴양지와 고급 호텔 그리고 밤마다 이어지는 디너 파티…. 하지만 북조선의 무기 거래 일꾼들은 그런 화려함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그저 한없이 소박하기만 하다. 국정원이 이들의 전화기에 RCS를 심기 위해 미끼로 던진 링크들의 목록을 살펴보면 떡볶이 블로그나 금천구의 벚꽃축제 같은 것들이다. 몇백만달러 또는 몇천만달러 짜리 무기를 사고 팔려면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산해진미를 맛볼 터인데 떡볶이에 입맛을 다신다니 얼마나 토속적인가. 또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보는 것도 많을 텐데 하필 금천구 벚꽃 축제를 클릭한다니 조국 강산을 사랑하는 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다.
포르노로 향수 달래고, 같은 민족 상품만 애용하는 국제간첩
일부 북한 공작원들은 자본주의 퇴폐문화에 젖어있기도 하다. <경향신문>이 위키리크스에 공개된 해킹팀 자료를 분석한 결과 국정원이 이용한 미끼 링크 가운데는 ‘포르노 사이트’도 있다고 한다. 무기 중개상 린다 김에게 어느 국회의원은 연애편지를 보내며 “산타바버라 바닷가에서 아침을 함께 한 그 추억을 음미하며…”라는 대목을 써놓아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전날 밤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문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한의 공작원들은 이국에서의 적적한 밤을 포르노 사이트로 달래고 있다는 거다. 남한의 무기 거래 문화와 비교하면 너무도 조촐해 보인다.
북한의 공작원들은 남조선에서 만든 삼성의 갤럭시에 푹 빠져있는 모양이다. ‘고려링크’라는 북한 회사의 스마트폰도 있고, 애플의 아이폰도 있건만 유난히 삼성의 갤럭시를 찾는다. 갤럭시 시리즈가 새로 나올 때마다 북한의 간첩들은 ‘신상’을 사댔다. 그 덕에 국정원이 바빠졌다. 국정원은 2013년 1월에 당시 출시한 지 7개월 밖에 안 된 삼성의 갤럭시S3 스마트폰 단말기를 이탈리아에 보내 분석을 의뢰했다. 또 지난 6월에는 갤럭시S6에 대한 해킹을 문의하는 등 스마트폰이 새로 출시될 때마다 이탈리아 업체의 문을 두드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는 아마도 ‘미 제국주의’가 만든 아이폰은 쓸 수 없다는 결의이자 ‘우리민족끼리’ 정신의 발로로 해석해야 할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는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카카오톡을 쓰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남한에서는 일반인들도 카카오톡 사찰을 피해 텔레그램 망명이 번졌는데, 보안이 생명인 간첩이 민족정신을 발휘해 카카오톡을 애용한 것이다.
게다가 북한 간첩들은 친절하기까지 하다. 국정원이 보낸 미끼에는 ‘천안함 1번 어뢰 부식 사진 의문사항 문의(<미디어오늘> 조현우 기자)’라는 제목으로 “박사님의 의견을 듣고 싶다”는 내용의 한글 파일도 있었다. 가능성은 두가지다. 북한 공작원과 미디어오늘 기자가 평소 친분이 있는 거다. 이럴 경우 불법적인 회합 통신으로 조 기자를 조사해야 한다. 하지만 조 기자는 이를 부인하고 있으니 다른 가능성은 ‘박사 간첩’이 일면식 없는 남한 기자라도 친절하게 응대해주는 좋은 품성을 가진 경우다. 여러 면모를 따져봤을 때 북한 공작원들은 소박하고 동포애가 넘치며 친절한 사람들이라고 봐야 한다.
■ 어리숙한 국정원
국정원은 이탈리아 해킹팀과 거래하면서 국정원의 대외 명칭인 ‘5163부대’라는 이름을 썼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1년 5월16일 새벽 3시에 한강을 넘으며 쿠데타를 일으킨 걸 기념해서 붙인 이름이다. 오랫동안 써온 이름이기에 전세계의 스파이들이 다 아는 이름이라고 한다. 지난해 이병기 국정원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는 김광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공개적으로 이 이름의 유래를 거론하기도 했다. 김 의원은 이 후보자에게 “흔히 국정원을 부를 때 5163, 7452라고 부른다. 왜 그런지 아느냐”고 물었다. 이병기 후보자가 모른다고 답하자 김 의원은 “5163 부대는 5·16 쿠데타 때 박정희가 새벽 3시에 한강을 넘어서 (붙은 이름)”이라고 설명했다. 7452는 7·4 남북공동선언을 위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판문점을 넘어간 날짜가 5월2일인 데서 유래됐다고 덧붙였다. 그러니 정보요원들이 5163부대라고 밝히는 건 이마에 ‘대한민국 국정원’이라고 써붙이고 활동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은밀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보기관으로서는 과감할 정도로 솔직한 태도이다. 아니 테러리스트들에게는 생명을 갖다바치는 거나 마찬가지다.
국정원은 ‘데빌엔젤’이 아니라 ‘그냥 엔젤’이다
그런데도 5163과 7452라는 이름을 버리지 못하는 건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박정희)와 어머니(이후락)에 대한 지극한 효심 때문일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 박지만씨가 대표인 EG 대표전화도 0516이니, 국정원과 지만씨는 효자로서 쌍벽을 이룬다. 그러니 나도 앞으로는 아버지 어머니 생일로 전화번호도 바꾸고, 은행 비밀번호로도 사용해야 될 것 같다. 국정원은 목숨도 내놓고 아버지 이름을 쓰는데 그깟 돈 몇푼 위태로워지는 게 대수겠는가.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국정원이 이토록 효성스러운 것은 뭔가 어리숙한 데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국정원은 이탈리아 해킹업체와 거래를 할 때 처음에는 자신의 신분을 감춘다고 감췄다. 직접 나서는 대신 나나테크라는 민간업체를 내세웠고, 나나테크는 해킹팀에 “자신을 드러내고 직접 구입할 수 없는 고객의 특성을 이해해달라”고 사정을 설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5163부대’라는 이름을 쓰면서 신분이 드러났다. 더군다나 해킹팀이 “배송 업체에 물건을 넘겼다”며 송장 작성을 위한 정확한 배송 목적지를 묻자, 대번에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초우체국 사서함 200번’이라고 알려준다. 국정원 민원 창구 주소다. 보는 이들은 다 아는데 저 혼자서 ‘영구 없다’를 외치던 그 옛날의 영구 같다.
그러니 이 정도면 순진함을 넘어 어리숙한 거다. 심지어 착해보이기까지 한다. 국정원 직원은 이탈리아 해킹팀과 이메일을 주고 받을 때 데빌엔젤1004(devilangel1004)라는 주소를 썼다. 국정원이 악마와 천사의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럴 필요 없다. 이 정도로 순진한 걸 보면 그냥 ‘엔젤1004’만 써도 될 성 싶다.
알고보니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병호 국가정보원장의 해명을 들으니, 남과 북의 스파이들은 한없이 순박한 분들이시다. 그동안 오해를 했던 건 아마도 007 같은 첩보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일 게다. 특히 <쉬리>는 잘못된 허상을 심어준 대표적인 영화다. 북한의 여간첩(김윤진 분)은 사람 목 하나 따는 걸 파리 한 마리 잡는 것보다 가볍게 여기는 냉혈한으로, 국정원은 최첨단 장비에 엘리트 요원(한석규 분)들을 모두 갖춘 조직으로 그렸는데 알고보니 양쪽 다 너무나 인간적인 분들이신 거다. 그러니 앞으로는 남북의 정보요원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기보다는 친밀감을 느끼게 될 것 같다. 길거리에서 이 분들을 만나면 악수라도 나누고 싶은 심정이다.
남한의 국정원 요원과 북한의 남파간첩이 연인으로 설정된 영화 ‘쉬리’의 스틸컷.
그런데 오해가 풀린 대신 새로운 의문들이 자꾸만 생긴다. 이토록 허술한 국정원을 운영하는데 왜 우리는 몇천명씩의 정보요원을 채용하고 일년에 몇조원씩 하는 예산을 투입하는 걸까. 떡볶이와 포르노로 유인하면 금방 넘어오는 북한 간첩인데 왜 현영철이 고사포로 처형되는 장면은 확보하지 못하는 걸까. 국회 정보위원회 의원들이 다음주 국정원을 현장 방문한다니 이에 대한 답을 찾아줬으면 좋겠다.
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