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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절망과 희망의 ‘아우성’ 속에서 움트는 변화의 씨앗

등록 2013-12-31 20:10수정 2014-01-02 11:51

‘응답하라 1228 뜨거운 안녕’ 행사가 지난 12월28일 오후 서울 청계2가 산업은행 앞에서 열리고 있다. 행사 참가자들은 각자의 안녕하지 못한 사연을 적은 종이를 ‘안녕의 벽’에 매달았다. 행사 뒤 이들은 서울광장에서 열린 민주노총 총파업 집회에 참가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응답하라 1228 뜨거운 안녕’ 행사가 지난 12월28일 오후 서울 청계2가 산업은행 앞에서 열리고 있다. 행사 참가자들은 각자의 안녕하지 못한 사연을 적은 종이를 ‘안녕의 벽’에 매달았다. 행사 뒤 이들은 서울광장에서 열린 민주노총 총파업 집회에 참가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대자보는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아우성이었다. ‘절망’과 ‘희망’이라는 열쇳말을 공유하는 대자보들을 조각그림처럼 한 곳에 모으자,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갈등의 지도’가 윤곽을 드러냈다. <한겨레>는 지난 12월18일부터 지면의 일부를 ‘대자보판’으로 만들어 시민들이 보내온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를 실어 왔다. 지면에 미처 소개하지 못한 절망과 희망의 메시지들을 모았다. 2014년의 안녕을 기원하며 2013년 누구도 안녕하지 못했던 한 해의 기록을 여기 싣는다.

“내 아이 성적, 남편 연봉만 절실했던 나를 반성했죠”

■ 직장인도, 주부도, 운동가도 ‘안녕들’로 통했다 ‘안녕하지 못함’의 원인은 다양했다.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파문부터 경남 밀양의 초고압 송전탑 갈등, 친일·독재 미화 교과서 논란, 스마트폰 약정 제도의 불합리성까지 두루 언급됐다.

경남 창원에 사는 주부 손상민씨는 “국가기관의 정치개입은 선거개입이 아니고, 어떤 소수정당 사람들의 ‘복고적’ 발언은 내란음모죄가 되는 사회. 역사교과서가 역사를 왜곡하거나 기술하지 않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나 나올 법한 사회. 이 모든 일이 농담이 아닌 사회에서 안녕할 리가 있겠는가”라고 되물었다.

고려대 재학생인 김성빈(24·노어노문학과)씨는 “우리가 쓰는 전기 속에 밀양의 눈물이, 밀양의 죽음이 담겨 있기 때문에 안녕하지 못하다. 원자력 산업에 들러붙은 자들의 배를 불리며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계속 달리기만 하는 한국의 핵 발전소 증설은 이제 그만 멈추기를 바란다”고 했다.

자신을 ‘40대 평범한 직장인’이라고만 소개한 한 시민은 “국민의 쌈짓돈으로 대기업만 더욱 부자가 된다. 스마트폰이 출시된 이후에는 무료통화 시간은 줄어든 것 같고, 요금은 너무 많이 올랐다”는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대자보 열풍은 ‘침묵하던 다수’와 ‘투쟁하는 운동가’ 모두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부산의 한 냉동창고에서 일하는 30대 중반의 정기훈씨는 “권력자들과 기득권 언론의 얄팍한 거짓말에 현혹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어쩌면 자신만의 안녕을 추구한 우리의 잘못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개인의 피말리는 생존게임이 아니라, 힘없고 약한 자들의 연대로 견고한 기득권에 균열을 가할 수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으면 한다”고 했다.

주부 이미경씨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며 이런 글을 보내 왔다. “정의와 상식보다는 당장 내 아이의 기말고사 성적, 내 남편의 연봉과 보너스가 더 절실했던 평범한 아줌마를 대자보가 변화시켰어요. 엄마라는 존재는 아이들이 세상을 보는 첫번째 창이라는 생각에 미안함이 밀려왔어요.”

‘최악의 환경 재앙’이라고는 평가받는 4대강 사업도 다시 도마에 올랐다. 이명박 정부 시절 전국의 4대강 공사 현장을 누볐던 녹색연합의 황인철 현장팀장은 “관료와 교수, 함께 박수치던 언론사, 22조원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던 건설사 등 4대강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들은 모두 평안하다. 전직 대통령 예우를 깍듯이 받으며 논현동에 머물고 계신 그 분의 안녕 또한 변함없다. 강을 망가뜨린 이들이 합당한 책임을 지고, 4대강의 생명이 다시 안녕하지는 것. 그것이 정의를 찾는 길이고, 그것이 진정한 안녕”이라고 강조했다.

용삼참사 유가족인 정영신(41)씨는 당시 무리한 진압을 지시해 참사를 일으킨 장본인인 김석기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이 최근 한국공항공사 사장으로 복귀한 것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피가 끓는 분노가 차오른다”고 했다. 정씨는 “김석기를 사장에 임명한 것은 박근혜 정권의 큰 오점이자 최악의 인사다. 안녕하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박근혜 정권을 향해 소리칠 것이다. 여기 사람이 있다. 함께 살자. 함께 싸우자. 함께 이기자”라는 글을 보내왔다.

‘전직 기자’ 김도연씨는 “대자보들에 공통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언론에 대한 분노였다. 대자보 현상은 일그러진 한국 언론의 부끄러운 자화상이 아닌가. 모든 것이 얼어붙는 시국에서도 기자 여러분의 펜만은 뜨겁기를 바란다”고 했다.

“달리기 내몰린 학생들, 뒤처지면 일어설 곳 없어요”

■ 중학생부터 70대 비혼 여성까지 남녀노소의 대자보가 몰렸다. ‘70대 초반의 비혼 여성’이라는 경기도 고양시의 김애순씨는 장문의 대자보에서 ‘비혼 여성’인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가졌던 기대와 현재의 실망을 담담하게 토로했다. 김씨는 “국민의 과반 이상이 지지했기에 그 어느 대통령보다 잘 해주기를 간곡히 바라며 희망과 기대를 걸기도 했다. 하지만 국가의 머슴들은 주인인 국민 위에 군림하고,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노동자들과 국민들을 타도의 대상으로 본다. 시국은 공포정치의 상징인 30년 전 유신의 상황으로 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중·고교생들은 경쟁사회의 불안함을 토로했다. 서울 서초구의 한 중학교에 다니는 박태민(가명·15) 학생은 “매년 뜯어고치는 입시제도 속에서, 우리는 명문대에 들어가도 취업이 안된다는 것을 알지만 명문대에 들어가려고 발버둥을 친다. 최소한 그곳에 가면 덜 불안할 것 같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광주 서석고등학교의 한 학생은 “수능 만점자 뒤에 숨겨진 다른 학생들의 노력과 수고는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만 같아 서러웠다. 학생들은 달리기를 해야 한다. 뒤처진 사람이 일어설 곳은 없다”고 썼다.

‘후퇴한 민주주의’를 걱정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경기도 일산동중학교에 다니는 이정(15) 학생은 “사회 시간에 민주주의에 대한 설명을 듣다 보면, 현재 대한민국의 현실이 겹쳐 보인다. 우리는 적어도 편 가르기하는 어른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적었다. 올해 대학생이 되는 최서현(17) 학생은 “한국사를 배우면서 처음으로 대한민국을 사랑하게 됐다. 소통하는 인재를 기르기 위해서는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교사도 응답했다. 초등학교 교사 김하나씨는 “아이들을 안녕하지 못한 수렁으로 내몬 것은 어른들이다. 누구도 오롯이 안녕함을 누리지 못하는 사회에서 과연 어떤 말로 아이들에게 삶의 가치와 정의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교실에서부터 약자의 안녕을 위해 당장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일의 가치, 편견으로부터의 자유, 사라진 정의를 이야기하겠다”고 적었다. 김씨의 대자보는 이렇게 끝난다. “작은 변화가 모여 마침내 이뤄낼 우리 사회의 안녕을 꿈꾸며, 오늘도 힘을 냅니다. 모두들 계신 곳에서 ‘부디’ 안녕하세요.”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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