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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채동욱 정보’ 의도적으로 활용했다면 책임자 처벌받아야

등록 2013-09-13 20:16수정 2013-09-24 11:13

초대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이종찬 전 원장이 지난 11일 <한겨레>와 만나 국정원의 개혁방안에 대해 목소리 높여 이야기했다. 그는 국정원의 ‘댓글 공작’과 엔엘엘 대화록 공개 등에 관해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선을 그은 뒤 “국정원은 정권안보 기관이 아닌 국가안보 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초대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이종찬 전 원장이 지난 11일 <한겨레>와 만나 국정원의 개혁방안에 대해 목소리 높여 이야기했다. 그는 국정원의 ‘댓글 공작’과 엔엘엘 대화록 공개 등에 관해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선을 그은 뒤 “국정원은 정권안보 기관이 아닌 국가안보 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특집] 이종찬 초대 국정원장 인터뷰
▶ 음지에서 양지를 추구한다던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으로 1년 가까이 양지에서 국민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원에 ‘셀프 개혁’을 주문했지만 국정원은 아직 묵묵부답입니다. 1965년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 공채 1기로 들어갔고, 1998년 김대중 정부 때 초대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 전 원장이 후배 요원들을 위해 ‘죽비’를 들었습니다. “정권 안보가 아닌 국가 안보를 위해 목숨을 걸라”고 충고합니다.

국가정보원은 더이상 ‘음지’에 갇힌 존재가 아니다. 대통령선거를 앞둔 민감한 시기에 야당 대선후보를 비판하는 인터넷 댓글을 조직적으로 달고, 야당 소속 박원순 서울시장을 종북 인사로 규정해 ‘제압 문건’을 만든 일은 모두 국정원이 한 일이다. ‘엔엘엘(NLL·북방한계선) 대화록’을 전격 공개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노무현 대통령이 엔엘엘 포기 발언을 했다”고 주장하는 모습을 보면 국정원은 이미 정치의 중심에 서 있다.

민주화 이후 국정원장을 역임한 이들은 지금의 국정원을 어떻게 바라볼까. 모두 침묵하고 있는 가운데 이종찬(77) 전 국정원장이 유일하게 언론에 입을 열었다. 이 전 원장은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신교동 우당기념관에서 <한겨레>와 만나 “국정원이 ‘국가 안보’가 아닌 ‘정권 안보’ 기관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했다.

이종찬 전 원장은 국정원의 ‘댓글 공작’과 엔엘엘 대화록 공개 등에 대해 “국정원이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현 정부의 정책을 뒷받침할 목적으로 남기는 인터넷 댓글이라면 “국가기관이 아닌 시민단체가 할 일”이고, 엔엘엘 대화록 공개는 “국가 기밀 누출”이라는 게 그의 견해다.

이 전 원장은 “국정원장이 판단을 잘못해 정치개입을 하려 하면 대통령은 이를 바로잡아줘야 한다”며 이명박 전 대통령도 비판했다. 이 전 원장은 “국정원을 잘 운영하기 위해서는 국정원 관련 제도를 정비하는 것보다 정보 전문가를 국정원장에 임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박근혜 대통령에게 “국가 안보와 정권 안보의 차이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국정원장에 임명하라”고 조언했다.

이종찬 전 원장은 김대중 정부 시기인 1998년 3월부터 1999년 5월까지 국정원장으로 재직했다. 국가안전기획부를 1999년 1월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꾼 당사자다.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정보수집에만 집중하라는 의미였다. 이 전 원장은 앞서 1980년 중앙정보부의 기획조정실장을 지내며 중정 개혁에 나서기도 했다. 이 전 원장은 1시간30여분간 진행된 인터뷰 말미에서 “국정원이 철저한 애국심으로 정권 안보가 아닌 민족의 생존권을 보위하는 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림팀을 없앨 땐 반발, 받아들이진 않아

-어떻게 국정원장이 되었는지부터 듣고 싶다.

“1980년 10월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의 전신) 기획조정실장을 끝으로 오랫동안 정치인으로서 살아왔기 때문에 다시 안기부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1998년 초 김대중 대통령 인수위원장을 지낸 뒤 서울시장 선거에 나설까 고민하고 있었다. 어느날 김 대통령께서 내 고민을 알고 나를 청와대로 불렀다. ‘이 선생, 이제 선거는 그만하고 안기부장 하면 어떻겠나’ 하시더라. 안기부를 개혁하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원래 1965년 중앙정보부 공채 1기 요원이었고 1980년 중앙정보부 기획조정실장이 되어 중정 개혁 업무를 맡았으니 적당한 사람이라고 봤던 것이다.”

엔엘엘 대화록 함부로 공개한
남재준 국정원장도 크게 잘못
이것은 엔엘엘 무력화 노리는
북한에 이로운 이적행위

아랫사람에게 댓글 싸움 시키고
정부 비위 거슬리는 말 나오면
거기에 반박댓글 달게 하고…
‘쫌팽이’(원세훈)가 대통령에게
잘 보이려고 했던 짓이라 생각

이종찬 전 원장은 1981년 민주정의당 창당 주역으로 활동한 이후 오랫동안 민주정의당과 민주자유당의 실세였다. 1992년 민자당 내에서 김영삼과의 대권 경쟁에서 밀려난 뒤 새한국당을 만들어 탈당했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과 연합해 국민의 정부 인수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이 전 원장에 대한 정치적 평가는 다양한 편이나, 국가 정보기관이 정치에 물들지 않도록 애써왔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특히 어떤 부분의 개혁을 주문했나?

“김대중 대통령은 국가 정보기관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개혁하라고 했다. 김 대통령 본인이 중앙정보부로부터 공작을 많이 당했잖나. ‘김대중 납치 사건’이 대표적이고. 또 월북한 천도교 전 교령 오익제씨가 김대중 대통령에게 1997년 11월20일 편지를 보냈는데 그것을 빌미로 안기부가 김 대통령을 간첩으로 몰아가려 했고, 또 윤홍준이란 사람이 안기부 공작금을 받고 ‘김대중 후보가 김정일에게서 자금을 받았다’고 거짓 기자회견을 하기도 했다.”

-정권 인수 당시 안기부는 어떤 태도를 보이던가?

“권영해 안기부장이 비밀문서를 폐기하고 있다는 소리가 들리더라. 내가 권 부장에게 전화해 ‘김대중 정부는 보복하는 정부가 아니다. 문서는 내버려둬라. 대신 진상만 알게 해달라’고 했다. 그런데도 엄청나게 많은 문서를 없앴다. 김 대통령은 안기부가 보복이라고 느끼게 하지 않고 순기능을 제대로 살리며 개혁하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

-이 전 원장은 안기부에 들어가 두 번 개혁 작업을 맡았다. 각각 어떤 일을 했나?

“1979년 10·26 사태(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사건) 때 중앙정보부가 정치개입의 ‘악의 극치’를 보여줬다.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나에게 중앙정보부가 국내 정치에 개입할 수 없도록 개혁을 맡겼다. 나는 안기부에서 국내 관련 수사는 안 하기로 하고 대공 관련 수사만 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뜻대로 안 됐다.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나니까 전두환 대통령이 ‘아차’ 했다. 전 대통령은 국내 수사 부문 폐지 유보를 지시했다. 1998년 안기부장이 된 뒤 1980년에 미진했던 개혁을 철저하게 하기로 했다. 국내 대공 관련 부서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다 축소해버렸다. 특히 국내 심리전담팀을 없앴다. 심리전을 북한을 상대로만 하라고 했다.”

-내부에서 반발은 없었나?

“미림팀은 없앨 때 반발이 좀 있었다. 미림팀 관련 직원들이 내 밑의 참모들에게 ‘간첩들을 잡는 데 그런 부서가 필요하다. 없애면 어떡하냐’고 하소연은 했다더라. 참모들이 이런 얘기를 전해주더라도 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림팀은 과거 중앙정보부 시절인 1960년대 중반부터 사회 각 분야 지도층 인사들이 빈번히 출입하는 업소의 종업원 등을 활용해 지도층 인사들의 동향을 파악했던 곳이다. 도청 기술이 발전한 1991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하다가 김영삼 정부 초기 해체됐다. 1994년 6월 활동을 재개해 1997년 11월 대선 직전까지 활동했다. 1997년 이학수씨와 홍석현씨의 대화 내용을 미림팀이 세 차례 불법도청한 일명 ‘엑스파일’이 공개돼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으로 원훈 바꾼 이명박

-1999년 1월 국가안전기획부 이름을 국가정보원으로 바꿨다. 이유는 뭔가?

“(안기부 전신인) 중앙정보부는 일제 때 독립운동가들 같은 사상범을 다루는 특별고등경찰의 유습이 남아 있는 부서였다. 태생이 국내 정치 개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안전기획부라는 이름도 뭔가 대내 사찰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아 싫었다. 그래서 내가 김대중 대통령께 ‘국가 안보는 중요하지만 정권 안보는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건의했고 그래서 이름을 국가정보원으로 바꿨다. 국가정보원의 영어 이름은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NIS)로 정했는데,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채택한 에이전시(agency)가 아닌 서비스(service)라는 단어를 택한 이유는 국민에게 봉사하는 기관으로 남게 하려는 이유였다. 내가 국가정보원장으로 있을 때 구호가 뭐냐면 ‘사바크 노, 모사드 예스’(SAVAK NO, MOSAD YES)였다. 국정원이 정치 반대파들 탄압하는 데 쓰이면 안 되고, 순전히 국가의 안보를 위해서만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1979년 이란 혁명으로 물러나기 전 팔레비 국왕은 비밀경찰(사바크)을 활용해 반대파를 탄압했다. 모사드는 1949년 창설한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이다. 국가의 생존을 위해 해외 특수작전을 병행하고 유대인 해외 이민을 허용하지 않는 나라로부터 유대인 탈출을 돕기도 한다. 내부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국가의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정보활동을 펴는 모사드를 이 전 원장은 정보기관의 모범으로 꼽는다.

“정보는 국가의 생존을 위해 무척 중요한 자원이다. 국가정보원 직원들이 이것을 명심하게 하려고 ‘정보는 국력이다’라고 원훈을 지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손수 글씨를 써서 바위에 새겼는데 이명박 대통령이 이것을 치워버렸다. 철저하게 김대중 대통령 때 만든 콘셉트를 다 버렸다. 그러니까 국정원이 이렇게 되는 거다. 인터넷 댓글이나 달고 국내 정치 개입한다는 오해 받을 짓을 한 것이다. 정보가 무엇인지 모르는 문외한들이다.”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안기부의 원훈은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였고, 이종찬 원장 이후 국정원 원훈은 ‘정보는 국력이다’로 바뀌었다. 이명박 정부 때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으로 바뀌었다. 이 원장은 ‘국정원이 망가졌다’고 언급할 때 얼굴이 다소 벌게졌다. 목소리도 커졌고 팔을 휘둘렀다.

-지금의 국정원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에 당시 주한 미국대사인 제임스 릴리를 나와 함께 만난 적이 있다. 릴리가 한국의 정보기관이 잘못 운영되고 있다고 아주 조심스럽게 충고했다. 자신이 중앙정보국에서 일해봤지만 정보요원들이 점점 편한 것만 추구하게 되고, 위험한 일은 안 하려 할 수 있는데 지금 한국의 정보기관은 북한을 상대로 중요한 정보활동은 안 하고 앉아서 보고서나 쓰려 한다는 식으로 말했다. 지금 우리 국정원이 인터넷 댓글이나 다는 것을 보면 릴리의 조언이 떠오른다. 국가의 안보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정보수집을 하는 게 아니라 사무실에서 댓글이나 다는 ‘페이퍼워크’를 하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제일 먼저 죽은 미국인이 누구인가. 군인이 아니라 중앙정보국 요원이다.”

2001년 11월28일 아프가니스탄 북부 마자르이샤리프 인근 수용소에서 미 중앙정보국 요원인 마이크 스팬(사망 당시 32살)이 포로들의 폭동 과정에서 살해됐다. 스팬은 미국이 9·11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2001년 10월7일 아프간 공습에 나선 이래 아프간 군사작전 도중 숨진 첫 미국인이다.

“내가 원장 재직 시에 요원들을 좀더 대외적으로 나가 뻗는 활동을 하라고 도곡동 국정원 청사 정문 앞에 광개토대왕비를 세웠다. 김구·신채호 선생의 초상화도 강당에 붙였다. 이들이 윤봉길·이봉창을 곳곳에 보낸 게 일종의 정보활동이다. 이런 정신을 배우라는 의미였다. 국가의 생존을 위해 정보투쟁에 나서라는 나의 모든 방향 제시를 이명박 정부가 다 없애버렸다. 지금 우리 국정원 요원들이 이렇게 된 것은 요원들 문제가 아닌 원세훈 국정원장 탓이다. 정보의 전문가를 원장에 임명했어야 하는데 평생 행정공무원 하던 사람을 임명한 것이 문제였다.”

FTA 찬성글은 자유총연맹 같은 단체가 할 일

-국정원은 (인터넷 댓글을 다는 등의) 대북 심리전이 필요하다고 설명하는데.

“4대강 사업 홍보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찬성글 남기는 게 무슨 대북 심리전인가. 그건 자유총연맹 같은 시민단체가 자발적으로 할 일이다. 국정원은 간첩 첩보를 입수하고 간첩 혐의자를 불러다 조사하는 곳이지 인터넷에서 ‘내가 옳다’고 논쟁하는 곳이 아니다.”

-북한이 남한 정부 반대세력 만들려고 국내 누리집에서 정부 비판글을 많이 남길 수도 있다면 이것에 대응할 필요도 있다는 게 국정원 주장인데.

“다시 반복하지만, 그것은 시민단체가 할 일이고 국정원은 정보를 입수하고 수사를 하는 곳이다. 국가정보원법에는 국정원의 심리전을 허용하는 조항이 없다.”

-간첩으로 의심되는 정치인이 있다면 국정원은 뭘 해야 하나?

“이 사람이 혹시 적으로부터 침투당하지는 않았나 이런 것은 계속 감시해야 한다.”

-아무리 그런 이유라도 국회의원을 사찰하는 것이 옳을까?

“애국가도 부르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 사람도 사상의 자유라면서 내버려두면 안 된다. 잘못하면 빌리 브란트 꼴 난다.”

냉전시대 긴장 완화를 위해 노력한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는 1974년 그의 비서 귄터 기욤이 동독에서 보낸 간첩임이 밝혀지면서 총리직을 자진사퇴했다.

-국정원 문건을 보면, 박원순 서울시장과 정동영 전 의원도 문제의 인물로 거론됐는데, 이들도 사찰해야 할까?

“야당이라고 해서 무조건 사찰하면 안 된다. 내 말뜻은, 간첩으로 의심될 만한 증거가 있어야 사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보활동을 하다 보면 하나둘씩 의심되는 첩보들을 입수하게 된다.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같은 경우 ‘RO(아르오) 모임’ 발각 이전에도 진보진영에서 이석기가 이상하다는 정보가 많이 들어왔다.”

-대신 사찰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정권 안보가 아닌 국가 안보를 위해서 일한다는 대전제가 있어야 한다. 또 사법부로부터 감청 영장도 받아야 한다. 만약 국정원장이 함부로 자신의 사견만으로 어떤 정치인을 사찰하라고 명령했다면 그것은 탄핵소추감이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왜 상식 이하의 활동을 지시했다고 생각하나?

“(미간을 찌푸리며) ‘쫌팽이’가 대통령에게 잘 보이려 했던 짓이라고 생각한다. 아랫사람에게 댓글 싸움 시키고, 정부 비위 거슬리는 말 나오면 거기에 반박 댓글 달게 하고. 그게 우리에게 뭐가 도움이 되나. 국정원 개혁을 확실히 해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 때는 국정원을 정치에 활용한 적 없었나?

“내가 국정원장으로 있을 때 실수한 적이 한번 있다. 당시 정부가 농협·수협·축협 통합을 추진하고 있었다. 단위조합의 이견이 많아서 잡음이 많았다. 그때 내 참모들이 ‘해당 지역 정보관들이 움직이면 해결된다’는 보고를 했다. 지역조합장들의 약점을 잘 아는 정보관들에게 압력을 가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내가 청와대로 찾아가 김 대통령께 ‘저한테 맡겨주시면 조용히 해결하겠다’고 건의했다. 그러자 김 대통령이 ‘이 원장, 우리가 이런 거 안 하기로 한 거 아니오?’ 하셨다. 이건 정권 안보를 위한 것이었지 국가 안보를 위한 것이 아닌데 내가 착각한 것이다. 국정원장이 판단을 잘못해 정치개입을 하려 하면 대통령이 이렇게 바로잡아줘야 한다.”

나도 국정원장 할 때 실수했다
정부가 농·수·축협 통합추진
조합 이견 많아서 잡음 많자
‘조용히 해결하겠다’ 건의하자
디제이가 제동 걸고 못하게 해

국정원장은 정치인이 아닌
정보 전문가가 임명돼야
나 역시 정치인이었기에
좋은 인사는 아니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국정원 댓글 작업’을 몰랐을까?

“당연히 보고가 됐을 것이다. 이 대통령은 원세훈 원장에게 ‘정치개입으로 오해받을 수 있으니 중단하라’고 했어야 한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 시절 국정원에도 과(過)가 있다. 2000년부터 2002년까지 국정원이 정치인들 불법 감청 해온 게 드러나 김승규 당시 국정원장이 사과했다.

“솔직하게 해줄 얘기가 있다. 김 대통령도 잘못한 게 한가지 있다. 김 대통령이 국정원에 차장으로 기용하면 안 될 사람을 기용했다. 김대중 대통령 후보 시절 국정원의 모 인사가 노란 봉투를 들고 후보 캠프로 찾아왔다. 그 안에는 중요 정보가 들어 있었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 국정원 정보를 팔아먹으러 온 것이었다. 내가 국정원장 재직할 때 그 사람은 기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그만둔 뒤 다시 그가 국정원 차장이 되었다. 자세히 밝힐 수 없지만 그 뒤 많은 일이 벌어졌다. 김 대통령이 반성할 부분이다. 그래서 나는 지도자가 제도의 정비보다 인사를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박근혜 대통령도 명심해야 한다. 사람을 잘 써야 한다. 국가 안보와 정권 안보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국정원장에 임명해야 한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국정원의 국내 파트를 분리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어떻게 생각하나?

“난 생각이 다르다. 지금 국정원 법대로 하면 국내 파트라도 말썽 날 게 없다. 국내 심리전은 법에 없는 활동이다. 국정원 법대로 안 해서 문제인 것이지 국내 파트가 있다고 해서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사생활 정보와 국가 안보가 무슨 상관인가

-정권이 바뀌면 국정원장도 바뀐다. 이를 어떻게 봐야 하나?

“정권이 바뀌어도 국정원장은 안 바꾸는 게 좋다. 국가 안보를 위해서만 일하는 사람이 정권 바뀌었다고 왜 그만두어야 하나. 클린턴 미 정부에서 중앙정보국장이었던 조지 테닛은 1997년 7월부터 2004년 7월까지 국장을 맡았다. 2001년부터 시작된 조지 부시 정부에서도 상당 기간 그 자리를 지킨 것이다. 또 공화당 아이젠하워 정부에서 중앙정보국장이었던 앨런 덜레스는 민주당인 케네디 정부에서도 중앙정보국장을 지냈다. 우리도 이렇게 해야 한다.”

-국정원장은 어떤 사람이 해야 하나?

“정치인이 아닌 정보 전문가가 임명되어야 한다. 나 역시 정치에 오염된 사람이었기에 좋은 인사는 아니었다.”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막기 위해 대통령 직속 기관인 현 체제를 바꾸면 어떨까?

“좋지 않다. 정보는 여러 단계를 거치면 새어나가게 돼 있다.”

-대통령이 올바른 철학을 갖고 있다는 확신이 들면, 국정원을 대통령 직속 기관으로 둬도 될 텐데 우리 사회는 여전히 대통령에 대한 불신이 심하다.

“꼭 그렇게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이제 국정원이 공개적으로 정권 안보를 위한 행동은 못 할 거다. 국정원 안에도 친여가 있고 친야가 있다. 이번 댓글 사건에서도 내부 고발자가 있지 않았나.”

-국정원 국정조사는 어떻게 지켜봤나?

“민주당과 새누리당 모두 잘못했다. 국정원에 대해 민주당은 검사 역할을 하고 새누리당은 변호사 역할을 했다. 왜 입법부가 사법부의 역할을 대신해 유무죄를 따지는가. 국회에선 ‘국정원이 왜 댓글을 달았나. 4대강 사업 방어하는 게 그게 너희 일이냐’ 이런 것을 따졌어야 한다.”

-검찰은 댓글을 단 직원들을 기소하지 않았다. 상명하복의 특성을 존중한다는 논리였는데.

“댓글을 단 말단 직원은 그렇다 쳐도, 국장급은 기소를 했어야 한다. 국장은 자신의 업무 지시에 대한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국정원이 여론의 악화에 대비해 정치적으로 정보를 공개한다는 비판이 있다.

“자꾸 뭔가 터뜨려서 뭔가 얻고 하는 게 습관화되어 있는 것 같다.”

-국정원이 채동욱 검찰총장의 혼외 아들 정보를 보수언론에 흘렸다는 의혹이 있다.

“정보를 수집하다 보면 채동욱 총장의 사생활도 수집될 수는 있다. 그러나 사생활 정보는 국가 안보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만약 국정원이 검찰 수사를 피하려고 이 정보를 활용하려 했다면 국정원 책임자가 처벌받아야 한다.”

-엔엘엘 대화록 공개도 정치적이라는 비판이 많은데.

“남재준 국정원장이 크게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정상회담 대화 내용을 함부로 공개하는 것은 월권 행위다. 국가원수 간에는 실제 공개된 내용 외에 다양한 얘기가 오갈 수 있어야 한다. 정상들의 중간 협의 과정에서는 최종 결과와 다른 내용의 대화도 오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함부로 공개해버리면 앞으로 어떻게 정상회담을 하겠는가. 또 ‘남한 대통령이 엔엘엘 포기 발언을 했다’고 공식 발표하는 것은 엔엘엘을 무력화하려는 북한에 이로운 이적행위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국정원이 올해 초 발표한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재판 과정에서 중요 증인에 대한 국정원의 고문과 폭행 의혹이 제기됐다. 법원은 피의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내가 국정원장 할 때 수사관들에게 명심시킨 것이 절대 폭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수사는 인내심의 싸움이다. 탈북자의 인권을 절대 유린하면 안 된다. 북한 정권이 무너지면 바로 통일 안 된다. 북한 주민들이 투표해서 남한과 통일하겠다고 동의해야 통일된다. 이 과정에서 북한 주민들에게 통일을 설득할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이겠는가. 탈북자다. 수사 과정에서 탈북자의 인권을 유린하면 이들이 우리 편이 되어주겠는가.”

-남재준 원장은 이런 고문수사 의혹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해명을 해야 한다. 원세훈 전 원장 때 벌어진 일인데 왜 해명을 안 하는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나?

“국정원 직원들은 철저한 애국 사상이 있어야 한다. 정권 안보가 아닌 민족의 생존권을 보위하는 기관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기에만 매진하면 국내 정치 문제는 신경쓸 여력이 없다. 이런 걸 안 하니까 그런 ‘잡스런’(댓글 다는) 행동만 하게 된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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