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전 대통령의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 장석윤씨는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거주중이다.
[한겨레 ‘크라우드소싱’ 기획] 전두환 재산을 찾아라
3. 육사의 상징이자 치욕 11기의 회고
“유교적 가부장 질서로 조직 운영
윤리관념은 반유교적이어서 모순”
회고록 ‘탱크와 피아노’서 비판해
“5·16쿠데타때 활약했던 윤필용
하나회 멤버들 군 요직에 심어
전두환, 막강 정보력 갖고 승리”
3. 육사의 상징이자 치욕 11기의 회고
“유교적 가부장 질서로 조직 운영
윤리관념은 반유교적이어서 모순”
회고록 ‘탱크와 피아노’서 비판해
“5·16쿠데타때 활약했던 윤필용
하나회 멤버들 군 요직에 심어
전두환, 막강 정보력 갖고 승리”
1979년 12·12 군사반란과 1980년 5월 광주 학살의 주범인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육군사관학교 11기 출신이다. 정규 4년제로 바뀐 육사에 입학해 졸업한 첫 기수이자 ‘육사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치욕’으로 꼽히는 기수다. 하지만 육사 11기에 정치군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군부의 정치개입에 반대하고 저항한 진짜 군인도 있었다.
현재는 미국에서 목회 중인 장석윤(80)씨가 그 한사람이다. 육사 11기 장씨는 중령으로 예편해 1970년대 초 미국으로 이민갔다. 뉴욕주립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엔지니어로 일했다. 기독교에 심취해 장로가 된 그는 현재 ‘남캘리포니아 한국 예비역 기독장교회’ 회장이다.
장씨는 이미 20년 전 전두환 전 대통령과 그를 중심으로 결성된 정치군인 조직 ‘하나회’를 비판하는 내용의 회고록 <탱크와 피아노>를 펴냈다. 전 전 대통령이 형사처벌되기 전인 1994년 7월의 일이다. 이 회고록에는 정치군인이 대통령이던 시절, 능력 아닌 정치력으로 인정받은 정치군인의 실상과 그 속류에 저항한 군인들의 이야기가 꼼꼼히 기록돼 있다.
“전두환씨와 하나회의 그릇된 생각은 한국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도그마와 환상 가운데 군대가 집권해야만 안보·질서를 유지할 수 있고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참으로 국민 경시의 편견의 병소가 그들 핏속에 흐르고 있는 데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하겠다. 이것은 오만방자한 사고의 소치이다.”
장씨는 하나회를 인정할 수 없었다. 진짜 군인은 정치가 아니라 안보에 유능해야 하며, 진짜 지도자는 정치인이 아니라 부하를 아껴야 한다고 여겨서다. 전직 대통령인 두 동기생의 위세가 여전하던 1994년 장씨의 목소리는 거침없었다.
육사 시절 전두환 전 대통령을 가르친 이영린 구대장이, 전두환 대통령 취임 직후인 80년 가을 미국으로 장씨를 찾아온 일이 있다고 한다. 구대장은 생도 훈육을 맡은 장교를 일컫는다. 그날 밤 둘은 대취했다. “너 한국 가서 전두환을 만나거든 2중대 3구대장 이영린이가 느그들 간성(방패와 성이라는 뜻으로 믿음직한 군대의 의미)이 되라고 했지 탈권까지 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았다고 분명히 전해라.” 80년 말 한국을 찾은 장씨는 정말로 청와대를 찾아갔다. 대통령 면회신청을 하며 사유란에 ‘육사 생도 때 2중대 3구대장 이영린씨의 구두 메시지 전달차’라고 썼고, 면회는 거절당했다.
장씨에게 하나회는 모순된 집단이었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주요 참모진이었던 하나회 멤버들은 전두환, 노태우를 유교적 가부장으로 모시는 데 급급했다. 그러나 돈과 권력에만은 철저하게 반유교적 윤리관과 도덕관념을 가진 그들이었다. 그들 하나회는 일찍부터 돈과 권력의 달콤한 맛에 중독된 환자들이다.”
<한겨레>는 장씨를 오랜 기간 수소문한 끝에 전자우편으로 인터뷰할 수 있었다. 그에게 전 전 대통령과 하나회에 대해 추가로 물었으나 장씨는 건강이 좋지 않아 길게 답하지 못했다. 장씨는 “졸저(<탱크와 피아노>)가 소개된다면 저로서는 큰 영광”이라며 군의 정치개입에 대한 반성은 당시 회고록의 발언으로 갈음했다. 장씨는 전자우편에서 동기인 전두환 전 대통령이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이유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장씨는 하나회를 장악한 전두환 뒤에는, 5·16 쿠데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비서실장 대리를 지낸 윤필용이 있었다고 했다. “하나회의 보스는 전두환이었다. 그러나 실질적 수장 격이며 절대 후원자는 윤필용이었다. 윤필용의 무소불위의 전횡으로 하나회 요원은 사전에 군의 핵심 요소에 배치되고 있었다. 즉 윤필용의 도움으로 하나회는 모든 군 지휘부의 요소에 배치되는 권한을 쥐고 있었다. 전두환에게 절대 충성하는 하나회 멤버와 보안사라는 막강한 정보수단을 겸한 전두환과 허울 좋은 군 참모총장과의 싸움에서는 전두환이 절대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12·12 군사반란에서 전 전 대통령이 승리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풀어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1955년도 당시의 특무대(보안사를 거쳐 현 기무사)장 김창룡 소장과 한국군 만군(만주군)파의 실질적 수장인 강문봉 중장과의 계파간 싸움에서, 김창룡 암살 사건이 있었다. 김창룡은 암살됐으나 특무대의 완전 승리였다. 세월은 25년이 흐른 1979년 12월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과 육군참모총장이요 당시의 계엄사령관의 한판승부에서도 역시 전두환의 완승이었다. 전두환은 보안사라는 수하의 정보요원이 중요 요소에 배치되어 모든 군부요원 하나하나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니 전두환은 앞을 보는 눈을 갖고 있었고 정승화는 전혀 부하의 동태를 보는 눈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의 승부는 보안사가 이길 수밖에는 없었다.”
장씨는 지금 80살이다. 전자우편에 길게 답하지 못할 만큼 건강이 좋지 않다. 전 전 대통령의 위세가 여전하던 때부터 그는, 육사시절 “전형”이라 불러온 전 전 대통령을 냉엄히 꾸짖었다. 그는, 육사 11기에 쿠데타를 저지른 정치군인만 있었던 게 아니라 참군인도 있었다는 기록을 후대에 남기고 싶어한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전두환의 은닉 재산을 찾아라 [한겨레 캐스트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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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11기 생도 시절의 전두환(왼쪽)과 노태우. 한겨레 자료사진
1955년 10월4일 서울 태릉 화랑대에서 열린 육사 11기 졸업 임관식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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