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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나는 서울의 택시운전사 ″사장 앵벌이에 불과…″

등록 2013-01-28 20:24수정 2013-01-29 08:44

택시 노동자 최아무개씨가 21일 오후 택시를 운행하며 본지 기자와 이야기하고 있다. 어지럽게 끼어드는 차들이 시야에 가득하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택시 노동자 최아무개씨가 21일 오후 택시를 운행하며 본지 기자와 이야기하고 있다. 어지럽게 끼어드는 차들이 시야에 가득하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2013 기획 격차사회를 넘어 ③ 택시
나는 서울의 택시운전사…하루 12시간 일해 월 130만원
몰락 중산층의 끝자락 노동…오늘도 빈곤의 시동 건다
갈수록 얇아지는 중산층의 두께는 한국 사회가 격차사회를 향해 치닫고 있음을 증명하는 유력한 지표다. 1998년 69.6%였던 중산층 비중은 13년 뒤인 2011년 64.0%로 줄었다는 게 통계청의 설명이다. 1997년 구제금융과 2008년 전지구적 금융위기를 거치며 한국의 중산층은 흔들리고 있다. <한겨레> 신년기획 ‘격차사회를 넘어’ 5회는 중산층에서 밀려난 삶들이 둥지를 트는 공간인 택시 운전석을 들여다봤다.

오렌지색 9704호 택시의 자태는 늠름했다. 택시의 세계에서 누적 주행거리 5만3000㎞면 거의 새 차다. 택시는 기사가 밟는 가속페달의 깊이만큼 금세 엔진회전수를 올리고, 운전대의 움직임보다 빨리 바퀴의 방향을 틀 것처럼 민첩해 보였다.

21일 오후 4시40분, 서울 면목동 ㅂ택시회사 차고지를 날렵하게 출발한 9704호 택시는 광화문에 첫 손님을 내려준 뒤 동자동 힐튼호텔까지 일본인 관광객을 실어날랐다. 곧 중국인 사업가 2명과 안내인인 듯한 한국인 1명이 올라탔다. 그들은 종로구 계동에 있는 어느 한국음식점에 가자고 했다. 항저우에서 온 중국인들은 한국에서의 골프 게임과 다음날 일정에 대해 얘기했다.

“항저우에서 오느라 힘들었겠어요.”

9704호 기사 최아무개(51)씨의 말에 옆에 앉은 한국인 안내인이 깜짝 놀랐다. “중국말을 다 알아들으시는군요?” 안내인은 뒷자리의 중국인에게 한참을 이야기했다. ‘한국 택시기사의 수준이 이 정도야’라는 자랑의 말이었다. 최씨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겨울비는 차창에 추적거리고 실내에는 나즈막이 음악이 흘렀다.

최씨가 해협을 사이에 두고 타이완과 마주한 중국 푸젠성 진장시에 처음 발을 디딘 건 1996년 초였다. 한국 사회에 중국 진출 바람이 막 일기 시작할 무렵, 공항에 내린 그의 손에는 서류가방 하나가 달랑 들려 있었다.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으로 신발을 만드는 중국 공장에 한국산 가죽 원단을 싸게 파는 게 그의 사업 목표였다. 통역 한명만 데리고 중국 공장을 돌아다니며 거래 트기에 나섰다. 경쟁자도 드물던 시절, 그는 금세 매출을 크게 늘려 나갔다. 달러를 버는 그에게 97년 조국의 구제금융 사태는 되레 기회로 다가왔다. 어떤 때는 한달에 4000여만원을 번 적도 있다. 아우디를 타고 일주일에 서너번은 골프장에 드나들었다.

“이촌동 좀 갑시다.” 중국인 사업가들이 내린 뒷자리에 새로 앉은 손님이 문을 닫으며 말했다. “네.” 짧은 대답과 함께 오렌지색 택시는 다시 서울의 밤거리 속으로 빠져들었다.

연희동과 서울역을 찍은 9704호 택시가 한양대 쪽을 향해 달리던 밤 9시24분, 궂은 날씨같은 라디오 뉴스가 흘러나왔다. “우리나라 국민 절반 이상은 소득수준이 중간층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중국에서 사업하던 때만 해도 최씨는 남부럽지 않은 중산층이었다. 하지만, 불행은 꾸러미로 그를 찾았다. 중국 관리들의 몽니, 거래처의 배신에 거듭 접질린 그의 신용은 회복하기 어려웠다. 2006년 중국 생활을 정리한 그는 서울로 돌아와 택시 운전대를 잡았다. 그렇게 6년의 세월이 운전석에 쌓였다.

9704호 50대 최씨
중국서 사업할 땐 잘나갔지만
사기당해 내리막길 걷다 이혼까지
“노가다 몸 안되니 운전대 잡지”

부의 상징, 강남을 달리다 21일 밤 9시37분, 서울 서초동행 여자손님을 태운 이후 9704호 택시는 주로 강남을 맴돌았다. 밤에 손님이 많은 곳이다. 강북의 보광동을 찍고 서초동 삼풍아파트에 남자손님을 떨군 택시는 일원동까지 가는 여자손님을 태웠다. 라디오에서는 김종서의 ‘겨울비’가 흘러나왔다. 수다스러운 걸 싫어하는 기사 최씨는 주로 93.9㎒ <시비에스>(CBS)를 즐겨 듣는다.

11시44분, 남자 두 명이 탔다. 목적지는 수서경찰서다. 한 명은 코가 비뚤어지게 술을 마셨다. 최씨도 중국 푸젠성 진장시에서 사업을 할 때는 공산당 간부들과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곤 했다. 한국인이 중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심심찮게 접대를 해야 한다. 서울의 ㄱ대 호텔경영학과에 입학했다가 ㅅ대 금속재료학과를 나온 최씨가 중국 땅을 밟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최씨의 첫 직장은 서울의 한 영어교재 회사였다. 1987년 입사했는데, 단군 이래 첫 올림픽 개최로 온나라가 들떠 있던 이듬해 회사는 문을 닫았다. 그는 이 곳에서 만난 여성과 90년에 결혼했다. 이듬해 처남이 운영하는 가죽원단회사에 들어가 무역 업무를 맡았다. 이 회사마저 94년 부도가 났다. 젊음이라는 유일한 무기를 들고 최씨는 푸젠행 비행기에 올랐다. 가죽무역을 하면 돈이 될 것 같았다.

최씨는 맨발로 판로를 개척했다. 한국에서 신발용 소가죽을 싸게 수입해 진장시 신발공장에 팔았다. 매달 컨테이너 8개씩 물량을 따냈다. “그럼 저한테 2000만원이 떨어졌죠.” 가족들을 중국으로 부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1년 벌어서 경기 분당에 3층짜리 빌라를 샀다. 부인은 진장시에 있는 호텔 1층에 70평 규모의 의류매장을 냈다. 가게는 중국의 신흥 중산층으로 북적였고, 한국에서 들여온 옷은 날개돗친 듯 팔렸다. 내친김에 진장시에 한국식당도 냈다. 한 층이 80평인 4층 건물 전체를 빌려 식당으로 썼다. 한국에서 데려온 주방장에 현지인 직원 30명을 고용한 큰 식당이었다. “그땐 뭐든 해도 될 것만 같은 혈기가 있었다”고 최씨는 말했다.

하지만 식당은 채 5달을 넘기지 못했다. 사전조사가 부족했다. 전력사정이 좋지 않은 지역 특성 때문에 1주일에 한 번씩은 전기가 나갔다. 식당 규모도 그가 유지하기에는 너무 컸다. 옷 장사도 시들해졌다. 부인은 아이와 함께 새로 가게를 시작해보겠노라며 상하이로 갔다. 동업을 시작한 한국인 바이어에게 사기를 당해 2억원가량을 현지 무역회사에 물어주면서부터 사업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최씨는 “사업의 세계에서 한 번 거꾸러지면 헤어나기 힘들다”고 말했다. 현지 직원이 3000만원을 들고 도망하는 일도 벌어졌다. 싱글을 할 정도로 골프에 푹 빠져 새로운 사업구상을 하지 않은 것도 최씨가 분석하는 실패의 원인이다.

2002년 한국에 들어온 최씨 부부는 헤어졌다. 멀어진 몸만큼 마음도 멀어진 탓이다. 분당의 빌라는 부인이 위자료로 가져갔다. 최씨는 그 뒤로도 4년여 동안 중국을 오가며 재기를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결국 2006년 6월 지금 회사에서 택시 운전대를 잡기 시작한 이유를 최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기술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데다 ‘노가다’ 뛸 몸도 안되니까요.”

한 택시 노동자가 21일 오후 운행을 마치고 서울 중랑구 면목동 ㅂ택시회사 차고지로 돌아와 세차를 하고 있다(왼쪽). 아래사진은 운행 수입을 입금 봉투에 넣고 있는 모습(오른쪽).
한 택시 노동자가 21일 오후 운행을 마치고 서울 중랑구 면목동 ㅂ택시회사 차고지로 돌아와 세차를 하고 있다(왼쪽). 아래사진은 운행 수입을 입금 봉투에 넣고 있는 모습(오른쪽).
9705호 70대 정씨
대기업 불공정 덫에 업체 부도
두 딸은 대학 졸업 뒤 비정규직
“같은 일 시키면서…정말 비참해요”

하루 매출 1억원의 기억 어느덧 날이 바뀐 22일 새벽에도 9704호 택시는 서울 논현동과 압구정동을 오가며 계속 손님을 받았다. 0시30분 즈음, 잔뜩 술에 취한 남자손님이 홀로 탔다. 거여역을 가자고 했다. 그는 계속 혼잣말을 했다. 택시비를 결제하라는 최씨에게 그는 “후배가 내지 않았느냐”며 애를 태웠다. 몇 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는 “아, 계산을 안했구나. 죄송합니다”라며 교통카드로 결제했다. 택시운전을 하다보면 밤시간에 이런 손님은 흔하다. 최씨의 바로 뒷번호인 9705호를 모는 정아무개(70)씨도 밤 늦게 술에 취해 반말을 해대는 젊은 손님 탓에 속을 끓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10여년 전 직원 80여명을 거느린 사장일 때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정씨는 유신정권 말기인 1979년에 가죽자켓을 만드는 선진패션이라는 회사를 세웠다. 80년대 말 가죽자켓을 백화점에 입점한 것도, 서울 신당동 광희시장에서 무스탕 제품을 팔기 시작한 것도 그가 처음이다. 광희시장에는 자신의 점포 두 칸을 차려놓고 백화점에 납품하는 것과 같은 자켓을 브랜드만 달리해 싸게 팔았다. 90년대 중반이 전성기였다. 디자이너와 함께 스페인에 직접 가서 원단을 사고, 프랑스에서는 전시회장을 다니며 새 제품을 연구했다. 미국에 수출도 했는데, 당시 연간 매출이 50억원에 이르렀다. 어느 겨울 ㅇ백화점에서 하루에 1억원어치를 판 기억은 여전히 짜릿하다. 면목동에 4층짜리 자체 공장도 짓고 암사동에는 대지 100평짜리 집도 마련했다.

1997년 구제금융은 그에게 악몽으로 남아 있다. 그해 1월 환율이 1달러에 900원가량일 때 계약한 대금을 연말에 갚으려고 보니 1달러가 2000원에 육박했다. 그때 입은 환차손만 10억원가량이다. 정씨는 백화점 입점을 지금도 후회한다.

“도둑놈들이라니까. 우리 매장을 좋지도 않은 6층에 넣어놓고는 수수료를 28%까지 받았어. 지들이 낼 부가세도 우리한테서 떼어가고, 걸핏하면 한정상품 내놓으라고 하지, 세일 전단지 비용도 우리한테 다 떠넘겼어. 브랜드 이미지 살린다고 내가 그짓(입점)을 한 걸 생각하면 지금도….”

백화점에서 받은 어음 6억원어치가 부도나면서 회사는 휘청거렸다. 엎친데덮친다더니, 당시 관행적으로 거래 업체가 여분으로 주는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팔았는데 이게 무자료 거래로 세무서에 걸렸다. 2004년 끝내 그는 공장과 집까지 남의 손에 넘기고는 큰 딸이 구해온 500만원을 들고 월셋방을 구해야 했다. 여전히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혀 있는 그를 지금 가장 분노케 하는 건 구제금융도 아니고 백화점도 아니다.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 문제다.

“두 딸이 대학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데, 정말 비참해요. 정규직이랑 똑같은 일 시키면서 급여는 50∼60%밖에 안주잖아요. 대기업은 돈이 남아 주체를 못 하고, 양극화는 더 벌어지는 거죠. 비정규직 문제 해결하지 않으면 서민경제는 살아날 수가 없어요.”

9747호 50대 조씨
한주에 70시간 넘게 일하면서도
대학생 자식 생각하면 한숨만
“세상 좀 바뀌었으면…희망 없어”

다시 일어설 수 없는 노동 22일 새벽 2시21분, 9704호 택시가 횡재를 만났다. 여자손님이 경기 남양주시 별내면을 가자고 했다. “외곽순환도로 타고 가주시면 좋겠어요.” 37분 만에 3만여원이 최씨 손에 들어왔다. 하루에 이런 손님 10명만 태우면 택시기사들은 떼부자가 될 게 틀림없다.

하지만 9747호 택시를 모는 조아무개(53)씨는 턱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한다. 조씨는 “희망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도 한때는 경기 마석 가구공단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규모의 설비를 들여놓고 가구를 만들었다. 노태우 정부 말기이던 91년이다. 손재주는 좋았으나 영업 마인드가 부족했다. 가구는 잘 만들기만 한다고 너도나도 사러 오는 물건이 아니었다. 공장을 접고 잠시 택시기사를 하던 그는 실내 인테리어 사업에도 도전했으나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다시 돌아온 게 지금의 회사다.

그가 하루 12시간씩 토요일까지 주당 70여시간을 일하고, 주마다 주간조와 야간조를 번갈아 뛴 결과 지난달에 받은 급여가 169만원이다. 이 정도도 이 회사에서는 많은 축에 속한다. 이 회사 기사들은 “대체적인 평균 임금은 120만∼130만원”이라고 입을 모았다. 조씨는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도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40만원짜리 낡은 빌라에 세들어 산다. 5년 전 암에 걸려 수술을 받은 부인이 좋지 않은 몸을 무릅쓰고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는데도 이렇다. 가벼운 치매에 걸린 노모와 다가오는 3월이면 대학 1·2학년이 되는 자식들을 생각하면 한숨만 나온다. “세상이 뭔가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 싶어 지난달 대통령 선거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는데, 결과는 “허탈했다.” 그는 세상에 하고싶은 이야기가 많다.

“제 딴에는 열심히 해보려 살았어요. 결국 안됐지만…. 아직 노동력이 남아 있으니 희망이 보여야 하는데, 그게 안보여요. 밥이라도 굶지 말아야겠다고 열심히는 합니다. 그래도 열 뻗쳐요. 아무리 노력해도 기본 급여도 안되니까. 50대 중반의 이런 절망감은 정말 비참한 거예요. 일하느라 팔이 퉁퉁 부은 마누라를 보면서 제가 그랬어요. ‘야, 굶어죽자’라고요. 이런 상황에 정말 너무 화가 나요.”

택시회사에서 일하는 기사들은 갈수록 먹고살기 힘든 직업이 바로 택시기사라고 입을 모은다. 몰락한 중산층이 많이 찾는 노동의 공간이지만, 택시 노동만으로 다시 중산층으로 올라선 이는 아직 업계에 보고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2000년대 이후로는 그렇다는 게 정설이다. 같은 회사에서 9759호를 모는 김아무개(55)씨도 같은 주장을 한다. 그도 한때는 중산층이었다. 사업이 잘 될 때는 서울 장안동과 잠실에 아파트도 한 채씩 갖고 있었다. 93년까지 5년 동안의 미국 이민생활에서 별 재미를 보지 못하고 귀국한 김씨는 회사택시를 3년 뛰고는 경기 일산 정발산역 인근에 당구장을 낸 기억을 갖고 있다. 금세 망하긴 했으나, 어쨌든 그때는 택시기사 생활 열심히 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택시 해서 애들 대학공부 시킬 수 있었다”고 김씨는 말했다.

9773호 60대 서씨
쥐꼬리 월급받아 월세만 30만원
중산층 회귀는 하늘의 별 따기
“택시 17년짼데 돈모으기 힘들어”

올해 환갑을 맞은 9773호 택시기사 서아무개씨도 생각이 같다. 독신인 그는 “이 생활 17년째인데 돈 모으기가 힘들다”고 말한다. 지난달 140여만원을 급여로 받았다는 서씨는 보증금 500만원짜리 방에 혼자 살면서 월세 30만원을 낸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택시법이 국회에서 재의결되면 그나마 상황이 좀 나아질 것으로 본다. “지금 택시업계 처우가 너무 어려우니까요. 대중교통으로 인정받아서 버스처럼 정부 지원 받으면 낫지 않겠나싶어요. 그 방법밖에는 없죠.”

택시 호수를 밝힐 수 없는 이 회사의 50대 김아무개씨는 택시법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다르다. “택시법 거부권 행사한다니까 택시 근로자가 아니라 사업주들이 더 반발하고 있잖아요. 택시법 통과돼도 우리가 혜택의 20을 먹는다면 80은 회사가 먹거든요. 엘피지 가스가 면세되고 도로통행료 면제되고 각종 세금 면제받는 건 사업주들이니까.” 22일 새벽 6시께, ㅂ택시회사 인근 식당에서 텔레비전 뉴스를 보던 김씨가 소주 한 모금에 떡만두국을 뜨다 말고 눈을 희뜨며 말했다.

다른회사 50대 김씨
“기사들은 사장 앵벌이에 불과
신차비에 카드 수수료도 뜯어
하루 벌어 하루 먹기 급한데…”

택시기사는 앵벌이다 22일 새벽 3시30분, 9704호 택시가 면목동 차고지에 들어왔다. 출발한 지 10시간50분 만의 귀환이다. 차에서 내린 기사 최씨가 배차실 창문을 열고는 11시간의 노동으로 번 18만8440원을 입금했다. 여느 택시회사처럼 정해진 ‘사납금’만 입금하지 않고 번 돈 전부를 입금한 까닭은 이 회사가 ‘전액관리제’를 시행하기 때문이다. 12만원가량의 사납금을 매일 회사에 입금하고 나머지를 기사가 갖는 사납금제와 달리, 전액관리제는 번 돈을 회사에 모두 입금하고 기본 월급과 인센티브를 받는 제도다. ㅂ택시회사는 기사들이 한 달에 230만원만 입금하면 기본 월급 110만원을 지급하고, 230만원을 초과하는 금액에 대해서는 일정한 비율에 따라 인센티브를 주고 있다.

전액관리제는 몸이 아파 일을 못 해도 제 돈으로 그날치 사납금 12만원가량을 메워야 하는 사납금제에 비하면 훨씬 인간적인 제도다. 그럼에도 서울시내 260여개 택시회사 가운데 90% 이상이 사납금제를 채택하고 있다. 스스로 어려운 처지임에도 ㅂ택시회사 기사들이 다른 회사의 기사들을 긍휼히 여기는 까닭이다.

서울 강북에서 130여대의 택시를 운용하는 회사에 근무하는 김수영(가명·53)씨는 소송을 준비 중이다. 김씨 회사는 매일 사납금 12만원에 신차비 3000원과 카드 수수료 1000원을 기사에게서 뜯어간다. 신차비는 회사가 회사 소유의 새 택시를 구입한 돈을 기사에게 부담시키는 악랄한 수단이다. 요즘 널리 퍼진 카드택시의 카드 수수료도 기사가 부담해야 한다. 모두 회사가 져야 할 부담이지만, 무슨 근거로 택시기사가 착취를 당해야 하는지 김씨는 이해할 수 없다. 사납금액이야 노조위원장이 도장을 찍어준 단체협약에 버젓이 적혀 있다지만, 신차비와 카드 수수료는 산정 근거도 없다. 게다가 법정 연차휴가도 제대로 주지 않는다.

택시 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해 투쟁해야 할 노동조합은 두 눈을 뜨고 보면서도 꿀먹은 벙어리다. 되레 적극적인 부역자 구실을 한다. “택시기사들은 회사 사장에게 속한 앵벌이에 불과해요. 노조위원장도 우리를 앵벌이시키는 자예요. 그런데 왜 기사들이 이런 썩어빠진 현실을 가만히 두냐고요? 하루 벌어 하루 먹기 급급하거든요. 제가 예전에는 시속 180~190㎞ 밟고 다녔어요. 사고는 겁나지 않아요. 내일 때거리 떨어지는 게 무섭지요. 저도 승차거부, 합승 안 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어요. 우선 제가 먹고살아야 하잖아요?” 김씨는 ‘앵벌이’의 삶을 조금이라도 바꿔보고자 자료를 모으고 있다. 동료 기사들을 모아 회사를 상대로 집단소송이라도 낼 계획이다.

김씨 회사에는 여전히 ‘1인1차’ 제도가 존재한다. 회사가 남는 택시를 기사에게 한 달 내내 주고 하루에 15만원 남짓한 돈을 받는 제도다. 기사는 교대자도 없이 하루 24시간을 꼬박 일하기도 하고, 졸리면 갓길에 차를 잠시 세우고 잔다. 살인적인 노동강도 속에서 “과로사로 죽을 정도로 뛰는 사람들”이라는 게 김씨 설명이다. “밥은 김밥으로 때우고 생리현상은 주유소에서 해결하고 트렁크에 옷가지 넣고 다니며 차에서 사는 기사를 본 적이 있어요. 강변북로 갓길에서 멈춰 서 있는 택시들 가운데 상당수가 1인1차예요. 그런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한 달에 300만원까지 벌기도 하죠.”

회사택시 기사가 중산층으로 다시 올라설 ‘희망의 사다리’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저임금 구조를 개선하려면 택시요금을 올려야 하지만 그러려면 택시 대수를 줄이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사납금제를 전액관리제로 바꾸기 위해서는 노사가 통큰 결단을 내려야 한다.

차고지에 들어온 9704호 택시기사 최씨는 시동을 끄지 않았다. “시동을 끄면 차창의 빗물이 얼기 때문에 겨울에는 시동을 잘 끄지 않아요.” 이 땅의 택시기사들도 빈곤의 시동을 끄지 못한 채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간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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