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등록 2012-12-21 20:33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그렉 베렌트 & 리즈 투칠로 지음, 공경희 옮김, 해냄출판사, 2004

워낙 유명한 책이라 설명이 필요할까마는 이런 소개는 어떨까. 지금 누군가 -20대 전후 여성일 가능성이 99.9%- 이 책을 사고자 한다면 결사적으로 말리겠다. 2004년에 출간돼 1년 만에 10쇄를 찍었으니 만 8년이 지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팔렸겠는가.

물론 많이 팔려서는 아니고 이런 책을 사려고 망설이는 상태라면 이미 연애는 깨졌거나 시작하지도 않은 것이다. 남자가 신뢰를 준다면 이 책의 존재를 알 리 없다. 책을 읽고 진실을 직면한 치료 효과가 없진 않겠지만, 자신에 대한 분노로 최소 며칠은 미칠 가능성이 있다.

이런 논리와 비슷하다. 가끔 학부모를 대상으로 대안교육 콘텐츠 강의를 하는데, 내가 가장 강조하는 이슈는 “공부해라”의 의미다. 이 말 들으면 공부하기 더 싫어진다는, 누구나 아는 이유도 있지만 입시 공부는 동기, 몸의 훈육, 목표 의식이 체화된 ‘당사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공부하라는 말을 듣는 학생이라면, 이미 공부가 자기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사랑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 하는 게 사랑인가? 공부도 마찬가지다. 하라고 해서 하게 되는 게 아니다. 사랑과 공부 모두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양도 불가능한’ 한 사람, 개체의 몸에서 일어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시중에 넘치는 ‘밀당’ 연애 지침서와 차원이 다르다. 오히려 밀당을 비판하는 성숙한 책이다. 남자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사소한 행동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고 사랑의 희망 속에 역병(疫病)을 자원하는 여성. 상대는 전화도 만남도 원치 않는데, 온갖 상상력으로 그 상황을 이해(조작)하며 남자가 자기에게 관심 있다고 믿는 여자. 남자가 헷갈리게 행동한 게 아니라 여자가 희망을 품고 있는 거다. 교육 정도, 계층, 여성의식과 무관하게 빈발하는 사회 문제다.

이 지옥을 경험한 여성은 알리라. 비참함, 수치심, 정신 가출, 기다림의 탈진,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 분노로 실신, 박살난 자존심, 내가 왜 그랬을까? 떠나지 않는 의문의 트라우마…무엇보다, 어이없음! 희망이 초래한 비극이다.

이 희비극. 개인적 차원에서 남자는 죄가 없다. 단지 남자는 남성성을 획득하는 구조 속에 살고 있다. 이 책이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사랑도 남자도 단순하다는 것이다. 단순한 사람을 가리키는 ‘단세포’는 글자 그대로 뇌가 없다. 반대로 여자는 뇌가 몇 개인지, 너무 많이 생각한다.

이 책은 근대 가족의 탄생과 공/사(연애) 영역의 분리, 이의 성별화 현상으로 요약할 수 있다. 심화 학습으로 자본주의의 고전인 재클린 사스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읽으면 된다. 자본주의는 사랑과 가족 문제를 여성의 일, 성역할로 할당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성별 이슈를 떠나 오랜(?) 세월을 이런 관계 연구에 매진한(?) 나의 관심사는 인식과 희망의 관계다. 인간이 평생 동안 가장 많이 생각하는 주제는 자기 합리화라고 한다. 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지나치면 문제겠지만 인간의 중요한 생존 기제다. 동시에 인생고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희망’보다 ‘원망’(願望)이 더 적합하다. 인간의 모든 인식은 자기 이익을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때로 간절히 원하면 ‘드림스 컴 트루’ 같은 인디언 서머(늦가을의 일시적 여름 날씨)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항상 있는 일은 아니다. 지성이면 감천? 하늘이든 하느님이든 존재하지 않는데 누가 감동하고 무엇을 베푼단 말인가.

희망은 마음의 욕망. 현실이 아니다. 사람은 희망 없이 못 산다고 하지만 착각 없이, 이데올로기 없이, 통념 없이 못 살 뿐이다. 희망보다 신앙을 갖는 게 낫다. 희망은 관념론이고 신앙은 유물론이다. 희망은 더 큰 욕망과 실망이 따르지만, 신앙은 겸손의 미덕과 포기의 위안을 준다.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다만, 가장 추잡한 남자는 헤어지면서 좋은 인상으로 기억되고 싶어 ‘희망 고문’을 지속하는 자, 두번째 저질 남자는 거절 못(안) 하고 질질 끌면서 여자의 감정과 자원을 착취하는 부류다. 이런 분들은 “코끼리에게 밟혀 죽어야 한다.”(14쪽, 저자의 표현을 편집한 것임)

정희진 여성학 강사

<한겨레 인기기사>

타임지 “박근혜의 전진, 순탄치 않을 것”
홍준표 “박근혜, 손석희 MBC 사장시키는 역발상 해야”
박지원, 원내대표직 사퇴…“혁신의 길 가야”
쓰린 속에 바치는 뜨끈한 위로 해장
시민이 뿔났다…“국민방송 만들자” 50억 모금운동
‘성매매 파문’ 미 인기 육상선수 “우울증 때문에…”
[화보] 문재인 담쟁이캠프 ‘눈물의 해단식’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속보] 경찰, ‘김성훈·이광우 겨냥’ 경호처 압수수색 시도 중 1.

[속보] 경찰, ‘김성훈·이광우 겨냥’ 경호처 압수수색 시도 중

막무가내 대통령에 국가폭력 떠올려…“이건 영화가 아니구나” 2.

막무가내 대통령에 국가폭력 떠올려…“이건 영화가 아니구나”

헌법 전문가들 “최상목, 헌재 결정 땐 마은혁 즉시 임명해야” 3.

헌법 전문가들 “최상목, 헌재 결정 땐 마은혁 즉시 임명해야”

‘주 52시간 예외 추진’에…삼성·하이닉스 개발자들 “안일한 발상” 4.

‘주 52시간 예외 추진’에…삼성·하이닉스 개발자들 “안일한 발상”

검찰, ‘정치인 체포조’ 연루 군·경 수사…윤석열 추가 기소 가능성도 5.

검찰, ‘정치인 체포조’ 연루 군·경 수사…윤석열 추가 기소 가능성도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