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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미안하다, 아들아…널 경쟁의 틈바구니에 살게 해서

등록 2012-10-02 21:14수정 2012-10-08 08:37

[인권이 최고의 아동·청소년 복지다]
④ 자식 사랑과 인권 사이
모든 부모는 자녀를 사랑한다고 한다. 자신의 자녀가 머리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도 단단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부모들은 학벌로 계급이 나뉘어지는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며 자녀들을 학교와 학원으로 떠민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앞에서 부모들은 자신이 잘하고 있는 건지 끝없이 되묻는다. 교사이자 소설가인 한기평(필명)씨도 그런 부모 가운데 한 명이다. 한씨가 고등학교 2학년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담긴 고민은 그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아들에게 부친 어느 아빠의 편지

아들, 기억하니? 아빠와 처음 만난 비 내리던 여름날을.

네가 세상으로 오던 날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병원 창밖으로 억수같이 퍼붓는 빗발을 보며 아빠는 너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명은 경이롭다. 더구나 새 생명의 탄생은 한 사내의 인생에서 가장 경이로운 순간이 될 수 있었다.

아빠는 이제 막 곁으로 온 너를 우돌이라 불렀다. 십만 원을 주고 작명소에서 새 이름을 지어온 뒤에도 소주 한 잔에 기분이 좋아진 날이면 아빠는 너를 우돌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그 이름 속에는 아빠의 환희가 들어 있다.

그로부터 열 몇 해가 흘렀다. 어느덧 너는 아빠보다 몸집이 큰 여드름 투성이의 소년이 되어 있었다. 처음 너를 만나던 날 너는 웃고 있었다. 웃고 있는 너를 보며 아빠는 다짐했다. 저 아이에게 행복한 삶을 살게 해 주겠노라고. 맑게 웃는 아이에게 웃음을 잃지 않게 해 주겠노라고. 그런데 너는 지금 웃음을 잃어가고 있다. 너는 지금…피곤하다.

아침 5시50분. 너는 눈을 뜬다. 쓴 입맛을 다시며 닭 모이만큼 밥을 먹고 너는 집을 나선다. 거리는 미명 속이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정류장에는 가방을 든 아이들만 웅성거리고 있다. 저쪽에서 눈을 비비는 친구들과 멋쩍게 인사를 나누고 너는 버스에 오른다. 먼저 버스를 탄 아이들은 머리를 파묻은 채 졸고 있다.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아침 5시50분, 너는 눈을 뜬다
닭 모이만큼 밥을 먹고 집을 나서
수업에 방과후학교 또 학원으로

밤늦게 퀭한 눈으로 집에 온 너
“안쓰럽지만 누구나 하는 거니까”
아빤 안쓰러운 감정을 억누른다

너와 뛰어놀던 게 언제였는지…
나와 내 가족만 잘살길 바라는
사내로 변한 아빠는 부끄럽다

우린 ‘잘 살기’ 위해 조급하다
어떤 게 잘사는 건지도 모르면서…
행복한 세상은 정말 불가능할까?

누가 정한 것인지 알 수 없는 7시20분은 네가 자리를 잡고 책상에 앉아 있어야 할 시간이다. 어둠을 뚫고 집을 나섰지만 7시20분은 네가 종종걸음을 쳐야만 겨우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규범의 벽이다. 자습이 시작되면 아이들은 하나 둘 쓰러진다. 책상은 좁지만 드넓은 침대가 된다. 너의 눈에도 활자는 몽환적인 그림으로 너울거린다.

종이 울린다. 흐린 정신으로 1교시를 맞이하고, 또 그놈의 알량한 지식을 전해주기 위해 선생님들은 점령군처럼 교실로 들어선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들은 너에게 절망을 가르친다. 들어도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공부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너는 수면과 각성 사이를 넘나들며 시간과 사투를 벌인다.

하루는 정확하고 규칙적이다. 점심을 먹고 너는 하루의 끝을 기다린다. 시간은 더디게 흐른다. 4시30분. 집을 나선 지 열 시간이 지났지만 하루는 계속된다. 정규 수업이 끝나면 또 다른 이름의 수업이 기다린다.

서울학생인권조례가 있다. “학생은 정규교육과정 외의 교육활동을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를 가진다.” 그러나 너는 쿨하게 권리를 포기한다. 60분의 아침자습과 빈틈없이 짜인 350분의 정규 수업. 70분의 방과후학교. 엄마들이 보내고 싶어 하는, 이 나라 제일을 꿈꾸는 자율형 공립고에 운 좋게 들어간 너는 8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는다.

드러내 놓고 경쟁을 부추기는 너의 학교는 냉혹하다. 너를 사육하는 학교는 질량의 면에서 약간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수업 시간을 줄이면 곳곳에서 독을 품은 화살이 날아오기 때문이다. 물론 480분의 학습노동이 하루의 끝은 아니다. 애석하게도 엄마들은 너희가 좀 더 긴 시간 동안 학교에 머물러 주길 원한다.

휴식권이 있다. “학생은 건강한 자아의 형성·발달을 위하여 과중한 학습 부담에서 벗어나 적절한 휴식을 누릴 권리를 가진다.” 눈물 나도록 고마운 이 조례가 태어나자마자 죽어버린 수사임을 너는 서서히 깨달아 가고 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너는 집으로 돌아온다. 오후 6시. 엄마는 아들을 위해 기름진 음식을 준비한다. 아빠는 피곤에 젖은 얼굴로 들어서는 아들을 향해 “오늘 친구들과 잘 지냈니?”라고 묻지 않는다. 아빠는 세상을 규정지을 따름이다. “시험은 언제 보니? 넌 공부만 열심히 해. 열심히 공부해야 나중에 고생하지 않는 거야. 열심히 공부하면 마누라 얼굴이 달라진다고 하잖아…”

너는 묵묵히 밥을 먹는다. 대화가 사라진 밥상의 책임은 이 땅의 부모에게 있다. 그것 말고는 화제가 없었을까? 네가 말없이 일어선 뒤 아빠는 후회하지만 “열심히”를 열심히 반복한 그 말은 시위를 떠났다. 너는 대화하지 않는다. 엄마에게 신경질을 부리고 아빠에게서 멀어지려고 몸부림친다. 너는 숙명적으로 휴대폰과 게임을 사랑하게 된다.

아빠가 소파에 파묻히는 것을 확인하고 너는 또 집을 나선다. 드넓은 초원에서 생존을 위해 떠나는 유목민처럼 너는 잠시 머무르다 집을 나선다. 이 학원에서 저 학원으로. 문제를 못 풀면 집으로 보내주지 않는 수학 선생님과 마주 앉아 너는 도무지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문제를 앞에 두고 낑낑거린다. 밤이 늦어 너는 퀭한 눈으로 들어온다. 아빠는 안쓰럽지만 누구나 하는 거니까, 하고 생각하며 감정을 억누른다. 알지 못할 비애감에 젖어들지만, 오늘을 사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감상은 사치일 따름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같이 불행하다. 시답잖은 학습 노동에 시달리는 아이를 바라보기만 하는 엄마와 아빠. 아이가 버릇이 없어도 공부만 잘하기를 바라는 엄마와 아빠. 경쟁의 시대를 비판하면서도 아이를 경쟁의 틈바구니로 내모는 엄마와 아빠. 가난의 아픔을 되새김질하며 자식이 그 길로 빠지지 않을까 애태우는 엄마와 아빠.

우리는 어떤 것이 잘 사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잘 살기’ 위해 조급하게 움직인다. 남보다 빨리, 남보다 멀리 가려는 일에 우린 너무 익숙해졌다. 우리는 다같이 우울하고 짜증스럽다. 지금 여기 있는 시간이 행복하지 않으면 인생은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아빠는 너와 함께 땀을 흘리며 산에 오르고 싶지만 짐을 꾸리지 못한다. 깊어지는 물빛을 보며 인생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너와 함께 떠날 수가 없다. 우리는 겨우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뷔페에 가서 배가 터지도록 음식을 먹고 쓸쓸히 돌아올 뿐이다. 너에겐 시간이 없다.

너와 함께 아무 걱정 없이 뛰놀았던 것이 언제였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잔디밭에 누워 노래 부르고, 밤이 늦을 때까지 배드민턴을 치던 그 시절이 아련하기만 하다. 행복했으므로 아빠는 그 시절이 그립고 또 그립다.

슬프고 미안하다. 잘못된 사회적 사건에 대해 공분할 줄 아는 사람,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할 줄 아는 사람. 유럽인들은 이들을 중산층이라 부른다. 그 잘난 대한민국에서는 30평 아파트에 살면서 한달에 500만원을 벌어들이고 중형차를 굴리며 1억원 이상을 가진 이들을 중산층이라 부른다. 물질이 중산층의 잣대가 되는 나라를 우리는 너희에게 물려주려 하고 있다.

이 땅이 공감한 중산층의 본질은 경쟁이다. 삶의 질이야 어떠하든 연봉으로 줄을 세우는 나라에서 우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며 우리는 같은 곳을 향하여 죽을 힘을 다해 달린다.

여태껏 아빠는 다같이 잘 사는 세상을 꿈꾸고 있었으므로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라고 여겼다. 이 땅에 나눔의 피 한 방울을 보탠 세대라고 믿고 있었다. 우리는 이 사회에 빚이 없는 세대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것은 연극이었다. 연극이 끝난 뒤 우린 숨어서 나만을 위해 살고 있었다. 겉으로는 ‘함께’를 외치지만 속마음은 ‘그래도 내가 먼저’라는 위선에 젖어 있었다. 우리들의 심연으로 들어가니 나만이 잘 되는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확장된 나의 자아가 기죽지 않고 살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다같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보자던 젊은 날의 외침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벽에 부딪혀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으로 돌아서버린 사내의 초상을 아빠는 아프게 바라본다. 너희가 행복한 세상은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너에게 고백하지 않았지만 아빠는 길을 잃고 있다. 스무 살도 아니면서 아직도 방황하고 있다. 부끄럽고 미안하다. 그 미안함 때문일까. 돌아서는 너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그래도 꿈을 꾸며 시를 읊조린다. 아주 나지막이.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저것은 벽/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그때/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도종환의 시 ‘담쟁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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