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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등록 2012-08-24 18:45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신약성서>, 마태복음, 5장 39절
(<한·영 성경전서>, 대한성서공회, 1987 외 참조)

평일 대낮인데도 예술전용관은 만석이었다. 광고 문구를 내 멋대로 편집하자면, <케빈에 대하여>는 “‘악마’의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에 관한 영화다. 고립된 노동, 여성에게 개인의 지위를 박탈하는 모성 제도를 논하지 않고는 접근하기 힘든 작품이다. 영화는 별 다섯 만점의 걸작이었지만, 마지막 장면에 실망한 나는 ‘엄마’보다 마태복음의 ‘악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성서는 중역(重譯)의 연속인 해석의 행위다. 모든 성서는 외전(外傳, 外典, 外轉)이다. 성서는 비어 있는 기호를 둘러싼 투쟁의 역사였고 특히 최근에는 여성주의와 민중신학, 퀴어 정치학의 열정적인 도전을 받아왔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요한1,1)? 태초에 목소리가 있었다,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성경은 언제나 원본 없는 개정판이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정치적(신학적) 해석 말고 표현상으로도 바이블은 없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의 앞 구절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반대하는 하느님이다. 따라서 보복하지 말라, 저항하지 말라, 앙갚음 말라, 대적하지 말라 등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나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가 가장 맘에 든다. 영어도 다양하다(resist, rise up, against, oppose). 겨우 해독 가능한 이 단어들도 셈족(族)의 언어(히브리어, 아랍어)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거쳐 루터의 독일어까지 수천년 역사의 모래알이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에 이어지는 “오른뺨을 치거든 왼편마저 돌려대고”… 마태복음 5장은 성서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중 하나다. 원수를 사랑하라에 대한 전통적 해석은 두 가지다. 정의롭고 지혜로우신 하느님께서 판단하실 문제다와 복수심이 아니라 연대와 정의감으로 압제에 항거하자이다.

성서는 투쟁을 먼저 가르치고 그다음에 용서를 가르쳤다. “하느님께 맡기자”는, 방관이나 굴종이 아니다. 악과 싸우는 것은 일단은 ‘반(反)악’일 뿐 그것이 곧 선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인간이 혁명을 믿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악인에 맞서지 마라”는 악인과 상대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닐까.

악에는 두 가지 단계가 있다. 첫째는 발생하는 악 자체로, 누구도 피할 수 없다. 문제는 가장 벗어나기 힘든 악, 피해자가 악을 치열하게 사랑하게 만드는 악이다. 바로 영화에서처럼 “왜 그랬니?”라고 묻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 악이다. 이유에 대한 질문은 죽음, 상처, 상실, 모욕과 같은 악의 피해가 지나간 후에도, 악의 지배를 지속시키는 장치다. 악이 만든 공간에 살면서 악을 평생의 주제로 삼게 하는 것이다.

구조, 즉 가해자와 피해자의 사회적 위치성에 대한 분석을 제외하면 악에는 이유가 없다. 악은 간단하다. 어떤 ‘나쁜’ 일을 하고 싶었는데 할 수 있어서 한 것뿐이다. 이는 보통 사람들의 소소한 악도 설명해준다. 사이코패스 존재나 ‘어린 시절 학대’ 같은 원인은 없다.(반례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악은 의도가 없다. 의지가 있을 뿐이다. 왜 죽였니? 왜 때렸니? 왜 그랬니? 악이 답한다. “그냥 그러고 싶었는데, 마침 그럴 수 있어서, 그때 그랬을 뿐.” 이 영화의 경우 아버지와 모성 신화가 그럴 수 있게 했다.

인과론은 이성에 대한 과신을 바탕으로 원인을 규명하여 문제를 개선하는 데 목적이 있다. 악의 정치에서 인과론은 잠시 피해자를 위로해준다. 원인을 알고 상대를 파악하면 덜 상처받고 미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애초부터 원인은 없을뿐더러 있다 해도 대단히 복합적이다. 혹 인과관계가 밝혀졌다 치자. “왜 하필 나지?”라는 더 치명적인 의문이 기다리고 있다.

악의 활동, 피해가 발생하는 시간은 짧다. 그러나 악의 이유를 묻게 되면 영원히 피해자가 된다. 왜?라고 질문하는 그 순간부터 ‘피해자 됨’의 진정한 의미, 불행감과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 당하는 것을 넘어 사로잡히는 것이다. 악의 이유에 대한 궁금증은 피해자의 자아 존중감을 파괴하는 악의 본질이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무관심으로 악의 기능을 중단시키자. 그럼, 누가 악과 싸우나? 그건 악 자신이 할 일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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