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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여자가 되는 것은 사자와 사는 일인가

등록 2012-06-15 19:23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 여성학 강사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고정희 시전집 1·2>, 고정희 지음, 또하나의문화, 2011

이 글의 타이틀 중 ‘여자’를 ‘○○’로 바꾸고 싶은 마음 간절했다. ‘사자’를 남성으로 생각할까 걱정돼서다. 이 시구는 여성=피해자, 남성=가해자라는 의미가 아니다.‘여자가 되는 것은 사자와 사는 일인가’는 고정희(1948~1991)의 시 제목 그대로다. 이 시는 시인이 자본주의 모순과 여성주의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시기에 쓴 것으로, 그녀의 시 세계를 대표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민중시든, 연시든 언어의 아름다움에는 차이가 없다.

“…그리하여 여자가 되는 것은/ 한 마리 살진 사자와 사는 일이다?/ 여자가 되는 것은/ 두 마리 으르렁거리는 사자 옆에 잠들고/ 여자가 되는 것은/ 세 마리 네 마리 으르렁거리는 사자의 새끼를 낳는 일이다?…”(2권, 522~523쪽)

구조와 개별 남성이 변해야 하는데, 남성성으로 조직된 가족, 사회, 국가, 시민사회가 먼저 변할 리 없다. 누리는 자 입장에서는 지금 상태가 좋고 성차별은 어디서나 ‘상식’과 ‘미풍양속’으로 합의되기 때문이다. ‘사자’의 자신감은 자기들은 칼자루를, 여자는 칼날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변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시인은 고뇌한다. 이때 변화는 저항이 아니라 자기 채찍질이다.

‘사자’의 요구, 무례, 폭력, 게으름은 꿈쩍하지 않으므로, 살아남기 위해 여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교정한다. 그들은 침대를 바꾸지 못하고 자기 발을 스스로 잘라야 하는 처지다. 가벼운 예는, 연애를 시작할 때 여성이 외모관리를 필두로 대대적인 자아 구조조정에 들어가는 경우다. 이처럼 여자가 되는 것은 사자에게 길들여지는 것이다. 문제는 한없이 복잡하다. 가정폭력처럼 사자에게 맞춰 산다고 해서 뜯어 먹히지 않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자의 발톱은 평화”.

“당신을 내 핏줄에 실어 버리고, 너의 참담한 정돈을 흔들어 버리자”는 요지의 다른 작품이 있는데 이루지 못할 사랑의 시인 듯하다. 그런데 내겐 아찔한 전복성이 느껴진다. 권력 관계가 지배자의 성찰로 뒤바뀌는 경우는 없다. 오늘의 메모가 성별 문제만으로 해석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은 모든 권력 관계다. 인간은 요구나 투쟁이 아니라 상대방이 기존과는 다른 반작용(re/action)을 행사할 때 변화한다.

간단히 말해, 구조는 개인에게 미치는 작용이고 그 구조에 대한 개인의 행위성을 리액션이라고 할 때, 구조에 편승한 이들의 변화는 약자의 예상치 못한 행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들’이 기대하는 익숙한 패턴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 책은 시선집이 아니라 시전집이다. 그런데 한 사람의 전집이 아니라 마치 ‘한국명시선’ ‘한국현대시인선’처럼 연애편지에 인용하기 좋은 시부터 신학, 민중, 자연에 이르기까지 인생과 시대를 아우르는 주제가 망라돼 있다. 이 책은 작년, 시인의 죽음 20주기를 맞이하여 ‘고정희 시전집 발간을 위한 기부 릴레이’에 참가한 이들의 성금으로 만들어졌다. 발문, 연보는 물론 그녀를 주제로 한 석박사 논문, 연구서까지 수록돼 있다. 전 2권. 각 644, 573쪽. 그녀의 우주가 후세대 여성들의 노력으로 재림한 것이다. 또 하나의 문화 동인을 주축으로 한 ‘고정희기념사업회’는 “작가로서 운동가로서 한국 사회에 탁월한 전범을 남긴 그녀를 기리고 젊은 문학인을 양성하기 위해” 올해로 9년째 ‘고정희 청소년 문학상’을 운영해오고 있다.

섣부른 생각이지만 고정희 같은 인물이 다시 나올까 싶다. 시집을 뒤적이다가 ‘사랑법 첫째’라는 시에 연필을 꽂아둔다. 관계, 즉 권력의 본질을 아는 순정한 사람은 사랑에도 통달하는 법이다. 시의 전문.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에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하여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1권, 384쪽)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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