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 여성학 강사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아무리 뉴스와 신문을 멀리해도 선거는 나를 흥분시켰다. 열 받음, 생각의 늪, 걱정, 안도…. 이들은 서로 충돌하지 않고 한마음으로 두통을 일으켰다. 선거 전후 어떤 시구가 염두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를 점령한 구절도 괴로웠지만, 나의 엉뚱한 독점욕도 가관이다. 워낙 빼어난 시인이고 유명한 시구지만, 오랫동안 나 혼자만의 앓이였기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또 너무 잘 쓰고 싶은 마음에 글을 망칠 것이 뻔했다.
지구상에서 개체수로나 영향력으로나 가장 막강한 생명체는 미생물이다. 그들이 없다면 지구는 며칠 안에 가스폭발로 우주에서 진짜로 사라질 것이다. 플라스틱처럼 동물의 사체도 분해되는 데 500년 이상 걸릴 것이다. 음식물은 악취를 뿜되 썩지 않을 것이다. 모든 물체가 사라지지 않고 쌓여간다면? 슬픔, 우울, 눈물…, 만일 이런 개념도, 현실도 없어서 사람들이 모두 조증 상태라면? 가능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시인은 다른 시집에서 이렇게 말했다. “슬픔은 온통 슬픔 전체일 뿐, 슬픔에도 기쁨에도 본래 짝지을 것이 없다”고.
자연도 인간이 만든 개념이지만 어쨌든 자연스런 상태라면, 구더기는 시신을 흙으로 돌려놓는다. 조장(鳥葬) 문화에서는 새의 작업을 돕기 위해 시신을 잘게 썰어 놓는다. 실제로 간혹 일어나는 일인데, 구더기가 취해서 할 일을 못하고 시신 표면에서 졸거나 기력 없이 헤매는 경우가 있다. 망자가 죽기 전 마약이나 음주 상태여서 구더기가 그걸 섭취해 제 기능을 못하는 것이다.
이건 약과다. 인간은 산 사람을 죽여가며 죽은 자의 미라를 만든 종족이다. 과학 기술이 발달하자 지구상 거의 모든 유기체에 방부제를 치고 있다. 소멸을 막기 위해 냉동고 같은 멈춤(freezing) 장치에 엄청난 에너지를 사용한다. 항체(antibody)는 생체(body)를 지연시키는 듯하지만, 둘은 모순의 연쇄를 이어가고 있다. 항체와 생체의 갈등 중 하나는 항간의 소문(?), “횟감에 항생제”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이성복의 시, ‘그날’의 마지막 구절이다. 그날이 실린(63쪽)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는 1978~79년께에 쓰여진 시들이 슬퍼하면서 서로 기대고 있다. 1980년 출판됐고 지금 내 책상 위의 것은 2001년판, 31쇄다. 1986년 처음 샀는데 나 혼자 변심을 거듭하며 끙끙댔다. 여러번 남들에게 줬고 여러번 다시 샀다.
성장 동력. 이번 정부가 쏟아낸 말이다. 성장도, 동력도 무섭다. 날선 기계가 굉음을 내며 맹렬히 돌아가는 느낌이다. 꺼지지 않는 엔진, 철야, 24시간 영업, 과로사, 강철 체력…. 흔히 “압축적 성장”이라고 표현하는 우리 근대화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돌진’이다. 목표가 너무 간절해서 신앙으로 승화된, 생각이라면 질색하는, 어떤 힘센 사람이 앞에 걸리적거리는 것은 모두 밀어내며 전진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슬픔이나, 아픈 사람은 짜증 차원을 넘어 ‘방해’, ‘억압’으로 느껴질 것이다. 국가보안법 같은 것이 그들의 심정을 제도한 것 아닌가.
선거나 청문회 때 후보의 이력에 대한 이 사회의 태도는 불감이 아니다. “그 정도면 양호”로 합의한 지 오래다. 부동산 투기, 병역 비리, 표절, 위장 전입, 탈세…. 모두 구비한 인물이 워낙 많기에 한두가지 정도면 청렴 반열이고, 이를 비판하면 “넌 깨끗하냐”는 분노가 되돌아온다. 여당이 과반을 넘긴 선거 결과에 우울하다는 지인이 많다. 조금 냉소적으로 말해 이 땅에서 진보와 보수는 국가 선진화 속도에 대한 견해차일 뿐이다. 때문에 과반의 경계는 허물어질 수도 있고, ‘덜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다.
나를 좌절시킨 것은 몇몇 후보들의 당선이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의 표현대로 “우리의 삶이 아무리 비천해도 그 고통까지 마비시키지는 못한다.” 고통이 아픈 것이 아니라 마비된 고통이 불러올 고통이 끔찍한 것이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아프기는커녕 “더욱 열심히 뛰겠다”고 한다. 썩지 않는 시체에 항생제를 붓는다. 인간이 인격체가 아니라 방부제인 사회. 절망할 기력조차 없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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