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컴퓨터 바탕화면의 ‘김수훤’을 보면서 ‘해품달’ 결방을 견디고 있다. 이 드라마는 상실에 대한 관찰이기도 한데, 시청자가 뽑은 명장면 1위는 16회, 월이 연우임을 알게 된 왕의 쏟아지는 눈물이었다. 나도 그 장면이 가장 좋았고 바탕화면도 그때 그 ‘용안’이다. 하지만 연우는 살아있지 않은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죽었는데… 드라마에 몰입해 혼자 울고불고하던 나는 외로웠다.
데이터로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곤 당대 베스트셀러는 읽지 않는 습관이 있다. <인생수업>도 그중 하나였는데 노상 헤매는 내게 인생 수업이 절실하다고 판단한 지인의 강권으로 읽게 되었다. 6년 동안 암과 투병해 온 아홉 살 소년이 죽기 직전 온 힘을 다해 자전거를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소년으로 인해 나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생의 수레바퀴>, <인간의 죽음>, <사후생>, <상실수업>… 알려진 대로 퀴블러 로스는 슈바이처처럼 살고자 했던 정신과 의사.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이며 죽음과 임종에 관한 세계적인 학자다. 책 표지를 전한다. “<인생수업>이 죽음을 맞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메시지라면, <상실수업>은 남겨진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다”
얼마 전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죽었다. 별세, 영면, 타계는 죽음에 대한 적합한 단어가 아니다. 죽음은 그냥 자연계의 한 생명체가 없어지는 것, 사라지는 것이다. 이제 그녀는 이 세상, 저 세상, 다른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녀가 없다는 것은 너무도 완벽하고 영원하고 절대적인 사실이다.
나는 <상실수업>을 다시 집었다. “평화는 고통의 정중앙에 놓여있다”(Peace lies at the center of the pain)는 5장 ‘사랑을 위해 사랑할 권리를 내려놓으라’에서 강함과 슬픔의 관계를 논하는 부분에 등장한다. 원서에서는 2장 ‘슬픔의 내면’(The Inner World of Grief) 중 힘(strength)을 설명하는 내용에 있다. 힘은 슬픔의 핵심적인 속성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구절을 평화론으로 읽는다. 평화에 대한 두 가지 주류 패러다임이 있다. 전통적인 국제정치학에서 다루는 전쟁과 평화의 이분법, 전쟁을 피하기 위해 평화는 힘으로 지켜야 한다는 안보 논리가 그 하나고, 마음의 평화를 강조하며 갈등, 분노, 불안정, 파괴, 증오가 없거나 줄이는 세상을 지향하는 ‘범(汎)득도세력’이다. 나는 이들 개념에 부분적으로 동의하고 또 열심히 공부한다. 그러나 열 명의 사람이 있다면 열 개의 평화 개념이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삶은, 나의 평화가 타인의 노동이며 ‘그들’의 이익이 ‘우리’에겐 폭력인 현실로 이루어져 있다. 평화의 정의는 성립하기 어렵다.
내가 지지하는 평화는 “폭력, 나는 그것을 지성이라 부른다”(마틴 루서 킹), “평화는 (여성성이 아니라) 여성이 주로 해왔던 돌봄 노동이 공적 영역의 가치로 전환될 때 가능하다”(사라 러딕), “열려 있다는 것은 항쟁을 배제하지 않는 것이며 폭력은 인간의 뛰어난 공존 양식이다”(사카이 나오키), “평화학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기존 학문 틀의 문화적인 폭력에서 벗어나는 것이다”(요한 갈퉁).
나약함, 병듦, 낙오, 패배, 거부됨, 지속되는 슬픔, 버려짐, 긴 망설임, 무기력, 우울, 의존, 좌절을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런 상태가 긍정되는 경우는 극복했을 때뿐이고, 이는 곧 생존과 번영으로 여겨진다. 극복은 원래 상태 혹은 ‘정상’으로 돌아온다는 회복(回復)을 뜻하는데, 이는 거짓일 뿐 아니라 불가능하다. 극복은 실상, 회피를 의미한다.
“평화는 고통의 정중앙에 놓여있다”는, 루저의 가치로 간주되는 보편적 인간 조건을 극복하지 말고 항복할 것을 권한다. 슬픔에 저항하지 말고 느끼고 통과하라는 것이다. “슬픔에 잠긴다”는 우리말은 정확하다. 몸이 슬픔에 잠겨 눈을 뜰 수도 숨을 쉴 수도 없는, 살아있는 죽음의 시간을 겪는 것이다. 고통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슬픔의 가치를 수용하는 것. 이것이 국가간 평화든 마음의 평화든, 평화에 대한 논의의 전주(前奏)이다.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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