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굴곡 많은 일대기〈1〉 출발
대학진학 포기뒤 징용피해 회사 취직
사업가·언론인으로 활동하며 ‘급성장’
대학진학 포기뒤 징용피해 회사 취직
사업가·언론인으로 활동하며 ‘급성장’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23년 음력 12월(양력으로는 1924년 1월)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아버지 김운식씨와 어머니 장수금씨 사이에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나중에 일제의 징용을 피하기 위해 출생연도를 1925년으로 고쳤다고 한다. 하의면은 목포에서 뱃길로 150리 떨어진 외진 섬이다. 후광리는 그의 아호 ‘후광’이 됐다.
그의 부모는 하의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어부들을 상대로 객주업을 했다. 김 전 대통령이 하의국민학교(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 부모는 아들 교육을 위해 육지인 목포로 이주했으며, 김 전 대통령은 목포제일보통학교(현 목포 북교초등학교)로 전학했다. 목포에서 부모는 여관업을 했다. 학교에서 김 전 대통령은 일본인 학생들의 텃세로 ‘이지메’(집단 따돌림)에 시달렸다. 그러나 꿋꿋하게 학교를 다녔고, 특히 웅변에 소질이 있어 곧잘 혼자서 연설을 하곤 했다. 1939년 이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며 목포일보 사장상을 받았다.
이어 당시 지역 명문인 목포공립상업학교(현 목포상고)에 진학했다. 1학년 때는 입학 성적에 따라 정해지는 반장을 맡기도 했다. 처음에는 취업반으로 들어갔으나 2학년을 마치고 친구들의 권유에 따라 진학반으로 옮겼다. 어학과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같은 또래 여학생들한테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44년 목포상고를 졸업한 뒤, 그는 진학의 꿈을 접어야 했다. 명문대였던 만주건국대에 응시했지만 서류전형에서 낙방했다. 그는 재수를 포기하고 목포상선회사에 취직했다. 일제의 징용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45년 해방이 되자 몽양 여운형 선생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으나 곧 탈퇴했다. 그해 그는 목포상선회사의 경리관리에 이어 재산관리인으로 선정되고, 11월엔 대표가 됐다. 그의 사업은 고속성장을 거듭했다. 전남선박 목포조합장, 대양조선 사장 등을 거쳐 48년 목포일보를 인수해 주필까지 겸하게 된다. 51년엔 목포해운(흥국해운) 사장에 이어 전남해운조합 회장으로 취임했다. 45년엔 미모가 뛰어났던 차용애씨와 결혼해 48년 큰아들 홍일씨를 낳았다.
그의 인생 초반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이유주현 송호진 기자 edigna@hani.co.kr
80년대 초는 전.노씨의 전성기였으나 양김에겐 혹독한 시련기였다.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1시 42분 서거했다. 사진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73년 8월8일 일본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 직후인 14일 동교동자택에서 납치와 관련한 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1973.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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