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굴곡 많은 일대기〈6〉 퇴임
2003년 2월25일 그는 동교동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대북송금 특검이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근영 전 금융감독원장, 이기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이 줄줄이 구속됐다. 특검은 “현대가 4억달러, 정부가 1억달러를 북한에 송금했다”고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현대의 대북송금은 크게 보아 사법적인 심사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고 여러 차례 불쾌감을 표시했지만, 퇴임한 전직 대통령은 힘이 없었다. 한광옥·권노갑·김옥두 등 핵심 측근들도 다른 비리사건 등에 연루돼 차례차례 구속됐다. 2005년 8월 자신의 재임 시절 정치사찰을 위한 국정원 불법도청 사실이 밝혀지자 그는 노여움을 감추지 못했고 그 직후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까지 했다.
2004년 4·15 총선에선 자신이 창당한 새천년민주당이 9석으로 쪼그라드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하지만 그는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사이에서 중립을 지켰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정치 개입은 하지 않겠다”고 공개 선언했으나, 어수선한 정치적 상황은 그를 놔두지 않았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모두 분열이 가속화되자 그는 틈틈이 민주개혁진영의 통합을 강조했다.
그런 와중에도 필생의 사업인 남북관계에 대한 그의 관심은 여전했다. 2003년 8월 퇴임 뒤 첫 공식연설에서도, 2004년 퇴임 이후 첫 국외 순방에서도 그는 “북한은 핵을 완전히 포기하고, 미국은 북한의 안전과 국제사회 진출을 보장해 줘야 한다”고 일관된 메시지를 발표했다. 2006년 6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계획했던 방북이 무산됐지만 그는 “미국과 남한이 대화하면 북이 핵을 포기할 수 있다”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이명박정부 들어 남북관계 위기,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것을 크게 걱정했다. 그는 지난 6월 11일 6·15 남북공동선언 9돌 기념 특별연설에서 “과거 50년 동안 피 흘려 쟁취한 민주주의가 위태로워 걱정”이라며 “피맺힌 심정으로 말하는데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며 시민들의 깨어 있는 자각을 강조했다. 특히 민주주의 위기 극복을 위해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할 방안을 구상했다던 그는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은 심정”이라고 통탄하며 영결식에서 눈물을 쏟아냈다.
‘정치인 김대중’은 한편의 대하소설 같은 삶을 살며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겼지만, 그의 마지막 길은 별로 편안하지 못했다. 그것이 그의 운명이었다.
이유주현 송호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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