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굴곡 많은 일대기〈5〉 영욕
98년 2월25일 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그는 ‘국민의 정부’를 표방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국정지표로 내세우고 외환위기 극복이라는 당면 과제에 매달렸다. 그는 과감한 경제개혁 조처를 추진했고, 그 결과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조기 졸업이라는 성과로 나타났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했고,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과 국민기초생활법을 제정했다. 정보통신 산업 부흥과 벤처 붐도 일으켰다.
‘햇볕정책’이라고 불린 그의 대북 포용정책도 현실화하기 시작했다.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외교·안보 정책의 핵심 목표로 설정한 그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화해의 메시지를 꾸준히 보냈다. 결정적인 것은 남북 당국간 경제협력을 제의한 2000년 3월9일의 베를린 선언이었다. 그는 2000년 6월13일 평양 순안비행장에 도착해 김정일 위원장과 포옹했다. 그리고 평양을 떠나기 전 역사적인 6·15 남북 공동선언문에 합의했다.
남북정상회담은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2000년 10월13일(한국시각) 오후 6시쯤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발표됐다. 그리고 12월10일 노르웨이의 오슬로시청 중앙홀에서 그는 평생 꿈에 그리던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영광 뒷면의 그림자도 짙었다. 지역감정 해소를 집권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그였지만, 대통령 재임 기간 지역갈등은 오히려 격화했다. 햇볕정책에 대해서도 ‘퍼주기’라는 말이 끝없이 나돌았다. 2001년의 언론사 일제 세무조사는 가뜩이나 좁은 그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압박했다. 경제위기 극복 차원에서 장려한 신용카드 발급은 임기 말이 되자 신용불량자 급증이라는 부작용으로 나타났다. 2000년의 4·13 총선에서 그는 ‘모든 것’을 쏟아 부었지만, 원내 1당은 한나라당이 차지했다. 임기 말이 되자 자식들의 비리가 쏟아져 나왔고, 둘째와 셋째 아들이 구속되는 아픔을 겪었다. 심장혈관질환과 만성신부전이 악화하는 등 건강도 급격히 나빠졌다.
이유주현 송호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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