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22일 영국의 싱크탱크인 영파운데이션이 지역의 혁신과 변화 방법에 대한 정책 보고서를 발간한 뒤, 제프 멀건 소장(가운데)과 전문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토론을 벌이고 있다. 영파운데이션 웹사이트
창간 20돌 기념 연중기획, 다시 그리고 함께[4부]
진화하는 세계의 진보 3. 영국
진화하는 세계의 진보 3. 영국
싱크탱크는 ‘기성복’이 아니다. 각 나라의 역사적·문화적 맥락에 맞게 독자성을 가미하면서 ‘맞춤복’으로 탈바꿈한다. 영국의 싱크탱크는 기성복에서 맞춤복으로 진화하고 있다. 첫회에 소개한 미국의 싱크탱크는 정치 엘리트들을 위한 정책 생산과 컨설팅이 주요 역할이다. ‘위로부터의 변화’에 강조점을 뒀다고 할 수 있다. 두번째로 게재한 독일식 싱크탱크는 시민교육을 중시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밑으로부터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거칠게 얘기하면, 영국은 애초의 미국 모델 따라하기에서 탈피해, 영국의 경험론 철학에 뿌리를 둔 강한 실천 중심의 싱크탱크로 방향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고민은 앞서 있지만 재정이나 연구인력 부족이라는, 우리나라의 싱크탱크와 비슷한 숙제도 안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번 영국의 싱크탱크에 이어, 일본의 풀뿌리 민주주의 등 외국 진보그룹으로부터 시사점을 찾아보는 연중기획을 계속 연재할 예정이다. 영파운데이션 - 교육불평등 개선 위한 ‘대안학교’ 실험
데모스 - 피부 와닿는 정책들 블레어때 수용도 지난 7월2일 가랑비가 흩뿌리는 속에 찾아간 영국의 싱크탱크 ‘영파운데이션’(The Young Foundation)은 시내 중심가에 위치해 있지 않았다. 런던 외곽의 베스널그린 거리에 있는 아담한 2층짜리 빨간 벽돌 건물 두채를 사무실로 쓰고 있을 뿐이다. 영파운데이션의 창시자인 마이클 영이 가난한 이웃들 속에 함께 있겠다며 당시 빈민가였던 이 거리에 사무실을 낸 바로 그 자리다. 영파운데이션은 토니 블레어 정부에서 정책실장을 지낸 제프 멀건이 2005년 소장으로 취임하면서 리모델링한 싱크탱크다. 1950년대 후반 마이클 영이 설립한 ‘공동체 연구소’와 ‘상호 부조 센터’라는 사회사업 조직을 통합해, ‘연구와 실천의 강력한 결합’을 내걸고 새로운 싱크탱크로 조직한 것이다. 옛 사무실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삶의 현장 속에서 강한 실천적 고리를 찾아 나가겠다는 뜻이다. 영국의 진보적 싱크탱크들이 실천과 일상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영파운데이션뿐만 아니라 블레어 집권의 산실이었던 데모스도 창립 초기부터 ‘일상의 민주주의’를 표방했다. 1980년대 초 미국식 싱크탱크를 본떠 세워진 영국의 진보 진영 싱크탱크들이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영파운데이션의 ‘직원’은 60여명에 이른다. 그러나 연구만 하는 인력은 없다. 때로는 조언자이자 상담자이며, 연구자이자 새로운 사회사업의 개발자이기도 하다. 연구자인 동시에 실천가(thinker and doer)라는 것이다. 멀건 소장은 연구만 하는 싱크탱크를 ‘옛날 모델’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의, 그리고 과거 영국의 싱크탱크들은 이론지향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천 지향적이다. 21세기에는 전통적인 싱크탱크들이 그다지 유용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디어와 연구결과를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정책을 실천 속에서 검증해 보여주는 접근 방식이 미국식 싱크탱크와 차이점이라는 것이다. 영파운데이션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교육불평등 개선이다. 멀건 소장은 “차별적인 부의 세습이 교육 불평등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영파운데이션은 빈곤한 지역의 청소년들을 위해 ‘스튜디오 스쿨’이라는 새로운 정책 모델을 개발해 2007년 12월부터 실험에 들어갔다. 스튜디오 스쿨은 정기적인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저소득층 자녀나 일반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14~19살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직업교육을 시키는 소규모 ‘대안학교’를 지역에 설립해 나가는 프로그램이다. 현재 올덤, 블랙풀 등 8개의 지방자치단체들이 학교 설립에 동참하고 있다. 토니 블레어 전 총리의 집권 산실이었다고 알려진 데모스도 1993년 설립 당시부터 ‘일상의 민주주의’라는 표어를 한번도 내려놓지 않았다. 알레산드라 부온피노 연구소장은 “민주주의는 정치적 영역에서의 선거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선거는 몇년에 한번씩 치러질 뿐이다. 시민과 정치영역을 일상적으로 연결하는 것이 민주주의이고, 그것이 생활정치다.” 데모스가 ‘일상의 민주주의’를 표방한 것은 당시 영국 정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보수당의 장기집권으로 병원이나 지방정부, 공공서비스의 질이 낮아져 전국적으로 시위가 일어났다. 그러나 노동당도 변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고, 노동당의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낀 사람들이 모였다. 급진적인 마르크시스트와 온건 자유주의자, 언론인과 공무원, 연구자, 녹색운동가 등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모여 던진 화두는 “시민들이 원하는 진짜 욕구가 무엇이냐”는 거였다. ‘일상의 민주주의’는 이런 고민 속에서 나왔다. 활동가들과 연구자들이 모여 교육, 건강, 고용, 지역 현안 등 피부에 와닿을 수 있는 생활 정책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노동당 주류 연구자들의 지적인 보수성을 뒤집어 엎는 모험이었지만, 블레어는 데모스가 내놓은 정책들을 대부분 수용하면서 힘을 실어줬다. 데모스가 제안해 정책으로 받아들여진 대표적인 것으로 사회복지 분야의 직접지불제(Direct payment)를 꼽을 수 있다. 직접지불제는 장애인이나 노인, 산모 등에게 현금을 줘서 본인이 직접 필요한 서비스를 구매하고 개인조력자를 고용하게 만드는 제도다. 정부가 사회적 약자들의 구매력을 높여주되, 당사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을 넓혀주는 것이다. 실천과 현장 지향적인 싱크탱크는 영국의 경험론적인 철학 전통을 가장 잘 구현하는 모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학문적이고 구태의연한 노동당의 기존 정책 생산 방식에 대한 도전이라는 성격이 더 강하다. 진화하지 않는 진보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교훈이기도 하다. 런던/이용인 기자 yyi@hani.co.kr
“이념과 실천 교량 역할이 성공적 싱크탱크 되는 길” 제프 멀건 영파운데이션 소장
제프 멀건(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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