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디자인’을 실천하는 프램 승.
[향기 나는 사람들] 영원한 자유인 프램 승
간첩 몰려 15년 동안 망명객처럼 세계 ‘만행’
‘타고난 나’ 아는 휴먼디자인으로 ‘자유’ 나눠
간첩 몰려 15년 동안 망명객처럼 세계 ‘만행’
‘타고난 나’ 아는 휴먼디자인으로 ‘자유’ 나눠
운명의 수레바퀴가 어느 쪽으로 굴러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프램 승(57)의 삶이 그렇습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그의 이름은 한국인들에게 낯섭니다. 이름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삶을 살아온 듯한 느낌이 듭니다. 프램은 산스크리트어로 ‘영적인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인도 출신의 영적 지도자로 지금은 세상을 떠난 오쇼 라즈니쉬로부터 받은 이름입니다. ‘승’은 그의 성처럼 따라다니지만 “예전에 쓰던” 이름 가운데 한 글자입니다.
그에게는 자유인이라는 말이 어울립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하는 일 없이 노는 사람”이라고 겸손하게 말합니다. 그는 특별한 직업이 없습니다. 강원도 산골의 집에서 주로 지냅니다. 인제군 북면 황태마을에서 산길로 1시간30분쯤 걸어 올라가면 작은 분지가 나옵니다. 태백산맥의 동서를 잇는 교통로 가운데 있고, 말을 거래하는 장이 섰다고 해서 마장터라 불리는 곳입니다. 이곳에 그의 집이 있습니다.
지난 10일 마장터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았습니다. 두 명이 간신히 누울 수 있는 방 두 칸이 잇대어 있는 야트막한 초가집이 그가 주로 지내는 곳입니다. 전기는 들어오지 않고 보일러도 없습니다. 저녁이 되자 그가 능숙한 솜씨로 밥상을 차립니다. 숯불로 지은 밥에 반찬은 마당에서 뜯어온 곰취에다 신김치, 된장, 고등어가 전부입니다. 반찬은 가끔 이곳을 찾는 이들이 남기고 간 것들이라고 합니다. 산속에서 숯불에 지은 밥이라 꿀맛입니다.
강원도 산골 오두막 살이…“지천명·주님 뜻대로·인샬라도 다 같은 말”
그의 삶은 돈이 거의 들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래도 생필품비나 교통비가 필요할 터. 그는 “아주 가끔씩 사기를 친다”고 말하며 웃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사기’란 알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휴먼디자인을 가르쳐 주는 일입니다. 가끔씩 대처로 나가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휴먼디자인은 사람의 타고난 성격, 적성, 건강 등을 알아내는 기법. 인간을 9가지 유형으로 나누는 애니어그램이나 성격유형검사인 엠비티아이(MBTI)와 비슷하지만 훨씬 복잡하고 정교합니다. 휴먼디자인에는 동양의 주역과 서양의 점성술에다 인도의 차크라(인간 몸 안의 에너지 센터를 가리킴)와 유대교 신비주의 전통인 카발라의 원리까지 들어있다고 합니다.
그가 휴먼디자인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이 생긴 모습대로 살 때 행복해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환갑을 앞둔 나이에 가족도 없이 강원도 산골에서 혼자 사는 자신에 대해서도 “내가 그렇게 생겨 먹었다”고 말합니다.
“공자는 이를 지천명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주님 뜻대로’라는 표현과 이슬람의 인샬라도 같은 말이지요.”
그는 휴먼디자인을 통해 자신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를 알고 나서 마음이 편해졌다고 합니다. 휴먼디자인은 그에 대해 “물질, 영, 사랑 등에 대한 방향을 일러주는 사람”으로 ‘디자인됐음’을 알려줬습니다. 프램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도 우연이 아닌 셈이지요. 목에 탯줄을 감고 태어나 언젠가 스님이 되리라 여겼다는, 지금은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말도 이해가 됐습니다.
남민전에 얽혀 고문…폐병 요양하며 ‘운동’하다 보안사 감시 프램 승은 젊었을 때 ‘혁명’을 꿈꿨습니다. 1971년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대에 들어갔지만 그의 눈에 우리나라는 군사독재정권 아래 친일파가 득세하던 “한심한 나라”였습니다. 그가 학생운동에 뛰어든 이유입니다. 전봉준을 존경했던 그는 녹두장군의 혁명정신을 배우기 위해 한때 천도교에 입문하기도 했습니다. 고초도 겼었지요. 79년말 ‘남민전 사건’으로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일주일 동안 고문을 당했고, ‘10·26 사건’이 난 뒤에 풀려났습니다. ‘혁명의 꿈’은 병 때문에 자주 방해를 받았습니다. 폐병에 걸려 대학 때 요양을 위해 마장터에 자주 머물렀던 그는 80년 졸업 뒤 아예 그곳의 땅을 사서 정착했습니다. 아무도 살려고 하지 않던 오지라 땅값은 쌌지만 학생이라 돈이 없었던 그는 친구가 결혼 부조금으로 받은 돈에다 부모를 졸라 ‘가불’한 결혼비용을 보태 4천 평의 땅을 샀습니다. 마장터에서 몸을 추스리면서도 그는 ‘운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미국에 유학하던 후배 황대권씨가 보내온 외국 잡지나 앰네스티인터내셔널 같은 인권단체 소식지에 실린 ‘광주 사태’ 이야기를 이리저리 알렸습니다. 황대권씨는 조작된 것으로 알려진 구미유학생간첩단사건으로 13년 2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던 사람입니다. 수감생활 중 쓴 책 <야생초 편지>의 저자로 널리 알려졌고, 지금은 생태공동체 운동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84년 어느날이었습니다. 마장터에 와서 알게 된 동네 친구가 깜짝 놀랄 이야기를 전해줬습니다. “보안대로부터 제가 간첩일지 모르니 잘 감시하라는 얘기를 듣고 그 사람이 간첩이라면 예비군 훈련 때 그렇게 대들고 싸우겠냐고 말했다는 겁니다.” 실제 그는 예비군 훈련을 받을 때 부당한 처사에 맞서 자주 싸웠습니다. “예비군 훈련 때 군인들은 소집 시간에 1분만 늦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날품팔이로 사는 사람들에게 공치는 날이 되고 말아요. 그렇게 시간을 중요시하던 사람들이, 어느날 예비군들이 연대장에게 인사를 제대로 안했다면서 다음날 훈련을 또 한다는 겁니다. 대판 싸웠지요. 그런데 다음날 되니 저 빼놓고 모두 훈련을 받으러 가더라구요. 그런 시절이었어요.” 그는 고민이 됐습니다. 자신이 모르는 어떤 일이 진행중인 것 같았습니다. 미국으로 이민간 여자친구가 귀국하자 곧바로 결혼식만 올린 뒤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습니다. 예감은 적중했습니다. 이듬해인 85년 구미유학생간첩단사건이 터졌습니다. 황씨는 한국에 다니러왔다 이미 붙잡혔고, 자신은 그 ‘간첩단’의 고위 조직원이 되어 있었습니다. 라즈니쉬 따라 인도행…독일 영국 브라질 등 떠돌다 무아경 체험
그가 다시 한국에 돌아온 것은 1999년. 미국 영주권자로 신분의 제약은 없었지만 무려 15년을 망명객처럼 해외를 떠돌며 지낸 뒤였습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이상하게도 영적 수행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오쇼 라즈니쉬를 따라 인도에서 머물렀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인도 전역을 다니며 여러 스승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라마나 마하리시나 바바지처럼 아드바이타베단타 계통의 스승들과 인연이 많이 닿았습니다. 푼자, 싯다 라메시와르, 랏지트 마하라지 등 많은 분들로부터 직간접적으로 가르침을 받았지요.”
독일,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멕시코, 브라질 등 세계 각지를 다니며 ‘만행’도 했습니다. 여행 경비는 주역으로 점을 쳐주고 단전호흡을 가르치며 벌었습니다. 병에 걸려 죽을 고비도 두 차례 넘겼습니다. “몸에서 영이 떠나는 것이 느껴지더라구요. 몸과 영이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아경도 체험했습니다. “사념이 완전히 사라진 채 몇 시간을 있었습니다. 나가 사라진 자리에 표현할 수 없는 희열만 가득했습니다.” 더 이상 만행은 필요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99년 정부가 귀국을 종용했습니다. 구미유학생간첩단사건을 종결지으려고 하니 귀국해 조사를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다짐을 받았지만 부담은 됐습니다. 마음 속에 걸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해 절망하던 그는 91년 호기심에 북한을 방문했었습니다. “한계가 많은 나라”임을 알고 돌아섰지만 그 일 때문에 지금까지 정보 기관의 ‘관심’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또한 자신이 ‘생겨 먹은 대로’ 살면서 생긴 일이라 개의치 않습니다. 요즈음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도록 도와주고 싶습니다. 다른 이들도 자신처럼 자유로워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 첫걸음은 자신을 아는 것부터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그가 20년 가까운 떠돌이 생활 동안 배운 다양한 수행법 대신 6년여 전에 알게 된 휴먼디자인을 인연이 되는 사람들에게 알려주려는 이유입니다.
자유는 자신을 구속하는 제약을 초월하는 게 아니라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를 알고 그것을 받아들이면 편안해집니다. 행복한 삶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인제/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두메라 프램 승은 숯불로 밥을 지어 먹는다.
남민전에 얽혀 고문…폐병 요양하며 ‘운동’하다 보안사 감시 프램 승은 젊었을 때 ‘혁명’을 꿈꿨습니다. 1971년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대에 들어갔지만 그의 눈에 우리나라는 군사독재정권 아래 친일파가 득세하던 “한심한 나라”였습니다. 그가 학생운동에 뛰어든 이유입니다. 전봉준을 존경했던 그는 녹두장군의 혁명정신을 배우기 위해 한때 천도교에 입문하기도 했습니다. 고초도 겼었지요. 79년말 ‘남민전 사건’으로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일주일 동안 고문을 당했고, ‘10·26 사건’이 난 뒤에 풀려났습니다. ‘혁명의 꿈’은 병 때문에 자주 방해를 받았습니다. 폐병에 걸려 대학 때 요양을 위해 마장터에 자주 머물렀던 그는 80년 졸업 뒤 아예 그곳의 땅을 사서 정착했습니다. 아무도 살려고 하지 않던 오지라 땅값은 쌌지만 학생이라 돈이 없었던 그는 친구가 결혼 부조금으로 받은 돈에다 부모를 졸라 ‘가불’한 결혼비용을 보태 4천 평의 땅을 샀습니다. 마장터에서 몸을 추스리면서도 그는 ‘운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미국에 유학하던 후배 황대권씨가 보내온 외국 잡지나 앰네스티인터내셔널 같은 인권단체 소식지에 실린 ‘광주 사태’ 이야기를 이리저리 알렸습니다. 황대권씨는 조작된 것으로 알려진 구미유학생간첩단사건으로 13년 2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던 사람입니다. 수감생활 중 쓴 책 <야생초 편지>의 저자로 널리 알려졌고, 지금은 생태공동체 운동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84년 어느날이었습니다. 마장터에 와서 알게 된 동네 친구가 깜짝 놀랄 이야기를 전해줬습니다. “보안대로부터 제가 간첩일지 모르니 잘 감시하라는 얘기를 듣고 그 사람이 간첩이라면 예비군 훈련 때 그렇게 대들고 싸우겠냐고 말했다는 겁니다.” 실제 그는 예비군 훈련을 받을 때 부당한 처사에 맞서 자주 싸웠습니다. “예비군 훈련 때 군인들은 소집 시간에 1분만 늦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날품팔이로 사는 사람들에게 공치는 날이 되고 말아요. 그렇게 시간을 중요시하던 사람들이, 어느날 예비군들이 연대장에게 인사를 제대로 안했다면서 다음날 훈련을 또 한다는 겁니다. 대판 싸웠지요. 그런데 다음날 되니 저 빼놓고 모두 훈련을 받으러 가더라구요. 그런 시절이었어요.” 그는 고민이 됐습니다. 자신이 모르는 어떤 일이 진행중인 것 같았습니다. 미국으로 이민간 여자친구가 귀국하자 곧바로 결혼식만 올린 뒤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습니다. 예감은 적중했습니다. 이듬해인 85년 구미유학생간첩단사건이 터졌습니다. 황씨는 한국에 다니러왔다 이미 붙잡혔고, 자신은 그 ‘간첩단’의 고위 조직원이 되어 있었습니다. 라즈니쉬 따라 인도행…독일 영국 브라질 등 떠돌다 무아경 체험
프램 승이 지난 10일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마장터에 있는 자신의 초가집 앞에서 신록이 우거진 산을 보며 활짝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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