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귀농 10돌을 맞은 김광화(오른쪽)·장영란씨 부부가 지난 3일 전북 무주군 진도리의 집 마당에 놓인 평상에 앉아 뜰에서 딴 앵두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향기 나는 사람들] 귀농 10년 김광화씨 가족
서울 생활로 얻은 우울증 전신마비 증세 ‘싹~’
아이들도 제도교육 벗어나 일도 공부도 ‘척척’
서울 생활로 얻은 우울증 전신마비 증세 ‘싹~’
아이들도 제도교육 벗어나 일도 공부도 ‘척척’
자연을 닮은 가족. 올해로 전북 무주에 귀농한 지 10년째인 김광화(51) 장영란(49)씨, 딸 정현(21), 아들 규현(14) 이들 가족에게 잘 어울리는 말입니다.
'김씨네'는 농사일부터 '자연'스럽게 합니다. 해가 뜨면 일어나 논밭에 나가고, 해가 지면 집에 돌아와 밥해 먹고 쉽니다. 봄, 여름, 가을에는 부지런히 움직이고 겨울에는 주로 집 안에서 독서나 글쓰기 등으로 마음을 살찌웁니다.
이들 가족의 농사는 자연농법이라 불립니다. 농약과 제초제를 쓰지 않는 유기농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철에 따라 작물을 기르고, 가족들이 눈 똥과 오줌을 거름으로 쓰며, 집 가까운 데서 얻은 재료로 퇴비를 만드는 것이지요.
철 따라 농사를 짓는 이유는 농사에 인위적인 에너지를 쓰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겨울에 비닐하우스를 지어 석유를 때어 채소를 기르는 농사는 이들 부부에게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부부는 햇살, 바람, 비 등 자연에너지만으로 농사짓기에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기계도 거의 쓰지 않습니다. 봄이면 온 가족이 논에 나가 손으로 모내기를 합니다. 밭작물을 심고 김을 맬 때도 일일이 손으로 합니다. 그러니 돈 들 일도 별로 없습니다. 이들처럼 살면 지구촌에는 에너지가 남아돌 듯 싶습니다.
1천평 논밭에서 기른 곡식 채소와 산나물 과실들로 ‘이문 남는 장사’
부부에게 자연의 흐름에 따른 농사는 늘 이문이 남는 장사였습니다. 동네 어르신들은 가뜩이나 힘든 농사를 더 힘들게 짓는다며 농약과 제초제 사용을 권했지만 자연은 늘 받은 것 이상으로 돌려줬습니다. 각각 3000여 ㎡(1천평) 규모의 논과 밭에서 기른 곡식과 채소는 물론 철철이 나는 산나물 들나물과 오디, 앵두, 배, 감, 밤 등 온갖 열매들. 김씨는 "늘 풍족해 주위에 나눠줄 게 많았다"고 합니다.
제철에 맞게 농사를 지어 나온 '철 든' 먹을거리와 무주 산골에서의 자연스런 삶은 가족에게 건강을 선물했습니다. 서울의 삶이 힘들어 한때 전신마비 증세까지 있던 김씨는 지금까지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습니다.
갓난쟁이 때부터 감기를 달고 살던 규현이도 비슷합니다. 특히 규현이는 무주의 자연 속에서 자라면서 자신이 몸을 스스로 추스르는 방법을 자연스레 터득했습니다. 규현이는 몸살이 나면 누워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쉽니다. 어떤 때는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지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루쯤 몸살을 앓고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일어난다고 합니다. 이들 가족이 귀농한 이유는 도시에서의 생활이 행복하지 않아서입니다. 부부 모두 한때 '역사의 부름'을 외면치 못해 변혁운동의 현장에서 10년 가까이 활동했었습니다. 하지만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 두 사람에게는 힘이 들었습니다. 김씨는 "도시에서 좌절할 때가 많았다"며 "세상을 바꾸는 운동은 고사하고 내 한 몸 추스르기도 힘들어 마음은 우울하고 무기력해졌다"고 말했습니다. 무기력증, 우울증에다 전신마비 증세까지 찾아왔습니다. 경북 상주의 산골마을에서 나고 자란 그는 자연 속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1996년 규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울내기'인 아내에게 농촌으로 가자고 설득했습니다. 장씨는 웃으며 그때를 이야기합니다. "그때 제가 규현이를 낳고 기르느라 정신이 없어서 얼떨결에 동의했습니다. 제정신이었으면 귀농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제 한 몸 건사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독립적인 사람으로 ‘쑥~’
귀농할 때 주위에서 모두들 자녀 교육을 걱정했습니다. 부부는 아이들을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키웠습니다. 두 사람의 눈에 학교 교육은 부자연스러웠습니다. 농사를 짓다 보니 같은 작물이라도 성격이 다르고 커가는 과정이 달랐습니다. 아이들은 더욱 그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학교라는 교육제도는 아이들이 가진 다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부부는 자연 속에서 아이를 키우기로 했습니다. 부모가 제대로 사는 게 가장 좋은 교육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과 학교 문제를 두고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습니다. 결국 정현이는 중학교 1학년 때, 규현이는 초등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 교육을 집에서 하면서 부부는 무얼 가르치기보다 함께 배우는 방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아이가 영어를 배울 때가 되면 식구가 함께 영어 공부를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요즘에는 자기들이 스스로 먼저 배워 부모를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림이 그렇고, 피아노나 기타와 같은 악기연주가 그렇습니다. 이렇게 두 아이는 농사, 요리, 읽기, 쓰기, 셈하기, 영어 등 '살림살이'를 배웠습니다. 규현이는 이를 "내가 계획해서 공부하니 홈스쿨링이 아니라 마이스쿨링"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10년을 지나면서 아이들은 제 한 몸 건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독립적인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아이들은 지금 논일 밭일에 익숙합니다. 산나물을 캐고 과실을 따서 갈무리하고 요리할 줄도 압니다. 지난해부터는 식사 당번도 돌아가면서 하고 있습니다. 아침은 부부가, 점심은 정현, 저녁은 규현이 차리고 있지요. 부모 생일 때 미역국을 끓이고, 손님이 오면 밥상을 차려 내오는 아이들, 정현이는 18살 때인 3년 전 지금 자신이 사는 집을 직접 지었고, 규현이는 <식객>을 보고 독학해 술까지 빚을 줄 압니다. 용돈도 스스로 벌기 시작했습니다. 정현이는 한 월간지에 글과 그림을 연재하고 효소를 담가 팝니다. 올해 400만원을 버는 게 목표라고 했습니다. 규현이는 술빚는 아르바이트를 구상중입니다. 또 술을 빚어주고 대신 숙박을 제공받으며 여행하는 꿈도 키우고 있습니다.
처음엔 시시콜콜 부부 다툼…눈높이 맞추자 ‘술술’
지난 10년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많은 도움을 줬지만 농사일은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땅심을 살려 땅을 갈아엎지 않고 작물을 심는 무경운 농사를 짓기까지 3~4년 동안 부부는 김매기를 위해 온종일 밭에 엎드려 살았습니다. 작물을 어떻게 심을지, 집은 어떻게 지을지 등을 놓고 다툴 때도 많았습니다. 고랑에 고추 모종을 몇 포기 심느냐를 놓고 격렬하게 부딪혀 결국 각자 따로 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자연이 그들에게 부부 사이를 가르쳤습니다. 김매기를 위해 몸을 낮추자 농작물이 가까이서 보였고 각각의 특성을 잘 알게 됐습니다. 부부 서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로의 다른 점을 알게 되자 인정하게 됐습니다. 바꾸라고 요구하는 대신 그 사람의 결에 맞게 대하게 됐습니다.
밭일은 또 다른 세계를 알려줬습니다. 김매기를 위해 눈높이를 낮추자 온갖 종류의 산나물과 들나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식물도감을 통역 삼아 그들과 알게 되는 과정도 재미났습니다. 장씨는 "굳이 애쓰지 않아도 자연은 철마다 어김없이 먹을거리를 가져다 줬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걱정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귀농 10년. 부부는 "이민 가느니 귀농을 하겠다"며 서울을 떠난 자신들의 선택이 옳았다고 말합니다. 도시 사람들의 눈에는 자급자족에 가까운 이들 가족의 삶이 가난해 보일 수도 있지만 부부는 늘 풍족하다고 합니다. 특히 농사를 지으면서 제철에 기른 곡식과 채소를 먹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기에 부부는 제철에 난 채소로 간단하게 만들어 먹는 '자연요리'의 노하우를 도시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고 합니다. 몇 해 전 동네에 인터넷이 들어온 뒤 홈페이지(www.nat-cal.net)를 만들어 글로써 사람들과 만나는 일을 시작한 이유입니다.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이 자투리땅에 텃밭이라도 가꾸면 좋겠어요. 자신의 손으로 제철에 키운 야채로 요리를 해먹기만 해도 행복하거든요. 그런 사람이 많아지면 세상도 조금은 평화로워지지 않을까요? 더불어 정부정책도 식량을 자급하는 쪽으로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 밥상이 불안하지 않잖아요?"
무주/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갓난쟁이 때부터 감기를 달고 살던 규현이도 비슷합니다. 특히 규현이는 무주의 자연 속에서 자라면서 자신이 몸을 스스로 추스르는 방법을 자연스레 터득했습니다. 규현이는 몸살이 나면 누워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쉽니다. 어떤 때는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지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루쯤 몸살을 앓고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일어난다고 합니다. 이들 가족이 귀농한 이유는 도시에서의 생활이 행복하지 않아서입니다. 부부 모두 한때 '역사의 부름'을 외면치 못해 변혁운동의 현장에서 10년 가까이 활동했었습니다. 하지만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 두 사람에게는 힘이 들었습니다. 김씨는 "도시에서 좌절할 때가 많았다"며 "세상을 바꾸는 운동은 고사하고 내 한 몸 추스르기도 힘들어 마음은 우울하고 무기력해졌다"고 말했습니다. 무기력증, 우울증에다 전신마비 증세까지 찾아왔습니다. 경북 상주의 산골마을에서 나고 자란 그는 자연 속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1996년 규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울내기'인 아내에게 농촌으로 가자고 설득했습니다. 장씨는 웃으며 그때를 이야기합니다. "그때 제가 규현이를 낳고 기르느라 정신이 없어서 얼떨결에 동의했습니다. 제정신이었으면 귀농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제 한 몸 건사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독립적인 사람으로 ‘쑥~’
김광화씨(왼쪽)와 아들 규현군. 규현이는 독학으로 술을 빚을 줄 안다.
김씨 부부가 딸 정현(왼쪽에서 두 번째)씨, 아들 규현군과 함께 집짓기를 하다 쉬는 시간에 직접 담근 막걸리와 효소차로 건배를 하고 있다. 박대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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