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소
1996년 영국 사회도 ‘광우병 논쟁’으로 들썩
‘타협과 조정’에 성공한 영국인들…우리는?
‘타협과 조정’에 성공한 영국인들…우리는?
1996년 3월, 런던의 봄(이라기보다 겨울)은 음산했다. 회색 구름이 머리 위 50m 상공에서 하루 종일 사람들을 짓눌렀다. 비와 눈이 섞인 진눈깨비가 하루걸러 한 번씩 거리에 흩날렸고, 오후 5시가 되면 해가 졌다. 그 도시에 왜 내가 있었던가. 실연의 상처를 입고 난생 처음 해외로 도피한 것이 한 달이 되고 석 달이 되고 여섯 달이 됐는데, 물론 그런 '고급스런 도피'가 가능했던 데는 아버지가 큰 맘 먹고 가산의 일부를 탕진하도록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난데없이 혼자 지리산을 며칠씩 헤매고, 절에 들어가 한 달씩 눌러 앉고, 선배에게 두들겨 맞아 볼이 퉁퉁 부어 들어오는 장남을 구제하기 위한 투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튼 실연의 청춘이 그 마음을 다져 잡기에 런던의 겨울은 너무 강퍅했는데, 춥고 습하고 배고팠다. 물가는 비싸고 말은 통하지 않고 친구도 없었다. 그때 이따위 감상의 갈피를 사납게 헤집고 들어온 사건이 하나 발생했으니, 이름하여 '미친 소 파동'이었다.
1986년 세계에서 처음으로 영국에서 '미친 소'가 발견됐다. 10년 뒤인 1996년 3월, 영국 정부는 이 미친 소의 질병이 인간에 감염될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공식 발표했다. (비록 10년 동안 끌긴 했지만, 그들의 정부는 그래도 도덕적이지 않나. 스스로 그 사실을 실토하다니!) 기다렸다는 듯 그 해부터 사람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10여 년 전 먹었던 미친 소의 위력이 잠복기를 거쳐 발휘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영국 정부는 급히 수만 마리의 소를 도살했지만, 영국은 물론 세계가 발칵 뒤집힌 뒤였다. 유럽연합(EU)은 즉각 영국 소의 유럽 본토 반입을 금지했다.
소고기를 먹으면 죽을 수 있다는, 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BBC 뉴스를 들으면서 나는 'mad cow disease'라는 새 단어를 하나 배웠다. 그건 마치 ‘쌀밥을 먹으면 10년쯤 뒤에 뇌에 구멍이 생기면서 미쳐 죽는다’는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설사 그게 말이 된다 해도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어찌 믿을 수 있는가. 아무리 천하의 BBC가 그렇게 보도해도 나는 실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소고기를 그냥 먹었다. 아시아에서 온 가난한 이주민이었던 나는 가격이 폭락한 소고기를 왕창 사서 자취방에서 불고기도 하고 두루치기도 하고 스테이크도 해서 먹었다. 10여년이 지난 요즘, 나는 급격하고도 치명적인 기억력 감퇴 증상을 겪고 있는데, 그게 잠복기를 거친 영국 미친 소의 변형 단백질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20여 년 동안 상복한 알코올과 니코틴의 위력이 이제야 발휘되기 시작한 때문인지, 심각하게 헷갈리고 있다.
여하튼 1996년 3월, 영국 사회는 큰 논쟁에 휩싸였다. 광우병을 둘러싸고 진보와 보수가 일전을 벌였다. 어느 날 오후, 영국 정부(당시는 블레어 집권 직전의 보수당 정부 시절이었다)는 런던 국회의사당 앞에서 이벤트를 하나 벌였다. 국회의원들이 직접 거리에 나와 영국산 소고기를 '무료로' 나눠 줬다. 내각을 포함한 의원들이 직접 그 소고기를 먹는 시연도 벌였다. 어땠을 것 같은가. 시민들의 반응은 열화와 같았다. 빅벤 시계탑으로 유명한 템즈 강변의 국회 의사당 앞에 런던 시민들이 줄을 서서 그 소고기를 받아 갔다. 다만 줄지어 소고기를 받아간 시민의 절대 다수는 노인이었다. 영국에는 혼자 사는 독거노인이 유난히 많은데, 네 발 달린 보행기나 큼지막한 지팡이에 몸을 기댄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그 '안전한 영국 소고기'를 무지하게 받아 갔다. 어차피 인간 광우병의 잠복기가 적어도 10년 이상이니 그 노인들은 걱정할 게 별로 없었던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보수당 정부는 새로운 프로파간다를 시작했다. 이른바 '음모론'이었다. 영국 소의 위험성이 완전히 입증된 것이 아니고, 체계적 검역을 거칠 경우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데도, 프랑스와 독일 등이 영국을 왕따 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치즈는 안전한가? 독일의 햄은 안전한가? - 뭐 이런 질문을 던지며 영국인들의 애국심을 자극했다. 때마침 유럽연합의 주도권을 놓고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이 각축을 벌일 때였다. 오랜 진통 끝에 유럽연합의 꼴이 제대로 갖춰진 것이 1995년이었다. 영국인들이 보기엔 유럽연합의 '단결된 힘'을 과시한 첫 정책이 영국 미친 소 대응책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옛날부터 영국의 성장을 시기한 프랑스, 독일이 유럽연합을 만들어 세를 굳힌 뒤, 미친 소 사태를 과장해 영국 경제에 대한 본격적인 '해상봉쇄'에 들어갔다는 논리였다. 이 음모론은 나름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요리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영국에선 샐러리맨들이 미국식 햄버거를 곧잘 끼니꺼리로 애용했는데, 맥도날드와 버거킹이 앞 다퉈 '영국산 소고기가 아닌 호주산 소고기를 쓴다'고 선전했다가 영국인들에게 엄청 항의를 받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들 햄버거 체인점은 한동안 소고기가 들어가는 햄버거를 일체 판매하지 않는 것으로 사태를 모면했던 것 같다. 그때 영국 좌파들은 무엇을 했을까. 그들은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생명운동'을 벌였다. 인권운동가, 평화운동가, 채식주의자(라기보다는 채식운동가) 등이 노동당 좌파 블록과 연합했다. 주장의 스펙트럼은 다소 넓었는데, 모든 육식을 금지해야 한다는 급진 채식운동가들의 논리부터 식용 가축의 사육만이라도 금지하자는 논리까지 다양했다. 다만 가축이라는 이름을 빌어 자연의 섭리에 반하는 방식으로 소를 대량 사육해온 인류 문명이 스스로에게 내린 형벌이라는 성찰의 기운은 이들 모두에게 공통적이었다. 런던 시내의 극장을 통째로 빌려 '채식 영화제'를 열기도 했는데, 가축의 사육과 도축 과정에 대한 다큐멘터리부터 육식의 반문명성을 풍자하는 단편영화까지 다양한 '고급 프로파간다'가 쏟아졌다. 그 시절 나는 실연의 상처를 잊고 행복해졌다. 불고기를 먹고 부른 배를 두들기며 가디언과 BBC에 등장하는 좌우 논쟁을 즐겼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심지어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정책 담당자는 물론 과학자, 철학자 등이 모여 생명, 가축, 육식, 무역 등의 전반을 가로지르는 토론과 논전을 거듭하는 것을 보면서, 무엇보다 이런 공론을 정책적 결과로 결실 맺는 민주주의 과정을 보면서, 나는 즐거웠다. 영국인들은 결국 ‘타협과 조정’에 성공한 셈인데, 이후 소에게 동물성 사료를 먹이는 일을 금지시키고 각종 검역체계를 한층 강화하는 한편, 소의 뇌·척수 등 광우병 위험부위에 대한 식용을 일체 금지했다. 식용 가축의 '생태적 사육'과 '위생적 유통'을 위한 사회 체제를 갖추는데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부었다. 그 결과, 영국의 검역체계는 광우병에 대처하는 유럽연합 회원국 전체의 모범이 됐다. 유럽연합은 영국의 미친 소를 수입하는 대신 미친 소 대응책을 수입한 셈이다. 미국과 비교할 수 없는 유럽연합의 도덕적이고 과학적인 검역 체계가 이렇게 만들어졌다. 미국의 미친 소를 다루는 이명박 정부의 허술한 실용주의를 타박하는 것은 두말이 아까울 정도다. 정상적인 보수주의자라면 한국 닭 수입을 금지하는 미국에 대해 연일 비방을 퍼부어야 옳다. AI 조류독감 파동이란 철새에 병원균을 묻혀 반도로 날려 보내는 이웃 나라들의 음모이며, 조류독감에 걸린 닭도 충분히 익혀 먹으면 아무 탈 없으니, 날지도 못하는 닭을 조리하여 식용으로 포장해 수출하겠다는 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떼라도 써야 한다. 그 정도는 돼야 미국의 미친 소와 한국의 감기 닭을 비교급으로 놓고 무역 협상을 벌일 수 있다. 보수주의자들이 그 정도의 역할을 해줄 때, 진보주의자들은 한국의 조류독감과 미국의 광우병 사이에 놓인 ‘생명’의 문제를 짚어 보편적인 생태운동의 차원으로 옮겨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다시 한 번, 보수주의자들이 친미주의자가 되고 진보주의자들이 애국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보수 언론이 ‘미국 소가 한국 소보다 더 위험한 것은 아니다’라는 기묘한 비교급의 기사를 쓸 때, 그것은 분명 비겁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다만 그 안에는 진보주의자들이 주목해야 할 지점이 아주 없지 않다. 한국 소는 정말 안전한가? 한국인들이 소를 기르는 방식은 미국의 기업적 축산농에 비해 얼마나 더 생태적인가? 현대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생태적으로 기른 소를 먹는다는 일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가난한 사람은 동물사료를 먹은 수입소를 먹고 돈 많은 이는 생태적으로 기른 국산소를 먹는 일의 생명권적인 계급 불평등은 과연 시장의 조절기제에 맡겨 해결해도 괜찮은 문제인가?
이런 물음이 사라진 미국 미친 소 파동을 지켜보는 일은 안쓰럽고 쓰리다. 삶의 기본과 국가의 기초를 지키는 몫을 보수주의자들이 하지 못할 때, 그 사회에는 어떤 상상력도 들어설 수 없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학교급식에서 미친 소 볶음밥을 먹고, 하교 길에 분식집에 들러 미친 소 뼈 분말스프 라면을 먹고, 집에 돌아와 미친 소기름 샴푸로 머리를 감을 생각을 하는 나는 '자 이제 우리도 생태적으로 올바른 삶을 위해 전면적인 채식을 시작해 볼까' 따위의 제안을 아이 앞에 내놓을 수 없다. 코앞에 들이닥친 생존의 위협 때문에 미래를 내다보는 성찰을 할 수가 없다. 미국 미친 소가 싼값에 들어오면 한국 소를 생태적으로 기를 축산농도 생태적으로 길러질 한국 소도 모두 사라질 것이다. 분노가 사색을 짓누른다. 저열한 실용주의가 먹고 사는 실용 그 자체를 무너뜨린다. 하여 오늘은 그냥 거리에 나가 미국 미친 소를 들여오려는 미친 사람들에 대해 미치도록 욕하는 것으로 한국 진보주의자 노릇의 전부를 대체하도록 하자. 언젠가 우리도 미친 소와 감기 닭을 앞에 두고 인간과 동물의 생명권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날이 올 것이라 기대하면서.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 이글은 한겨레 안수찬 기자가 ‘인권실천시민연대’에 기고한 글입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보수당 정부는 새로운 프로파간다를 시작했다. 이른바 '음모론'이었다. 영국 소의 위험성이 완전히 입증된 것이 아니고, 체계적 검역을 거칠 경우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데도, 프랑스와 독일 등이 영국을 왕따 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치즈는 안전한가? 독일의 햄은 안전한가? - 뭐 이런 질문을 던지며 영국인들의 애국심을 자극했다. 때마침 유럽연합의 주도권을 놓고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이 각축을 벌일 때였다. 오랜 진통 끝에 유럽연합의 꼴이 제대로 갖춰진 것이 1995년이었다. 영국인들이 보기엔 유럽연합의 '단결된 힘'을 과시한 첫 정책이 영국 미친 소 대응책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옛날부터 영국의 성장을 시기한 프랑스, 독일이 유럽연합을 만들어 세를 굳힌 뒤, 미친 소 사태를 과장해 영국 경제에 대한 본격적인 '해상봉쇄'에 들어갔다는 논리였다. 이 음모론은 나름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요리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영국에선 샐러리맨들이 미국식 햄버거를 곧잘 끼니꺼리로 애용했는데, 맥도날드와 버거킹이 앞 다퉈 '영국산 소고기가 아닌 호주산 소고기를 쓴다'고 선전했다가 영국인들에게 엄청 항의를 받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들 햄버거 체인점은 한동안 소고기가 들어가는 햄버거를 일체 판매하지 않는 것으로 사태를 모면했던 것 같다. 그때 영국 좌파들은 무엇을 했을까. 그들은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생명운동'을 벌였다. 인권운동가, 평화운동가, 채식주의자(라기보다는 채식운동가) 등이 노동당 좌파 블록과 연합했다. 주장의 스펙트럼은 다소 넓었는데, 모든 육식을 금지해야 한다는 급진 채식운동가들의 논리부터 식용 가축의 사육만이라도 금지하자는 논리까지 다양했다. 다만 가축이라는 이름을 빌어 자연의 섭리에 반하는 방식으로 소를 대량 사육해온 인류 문명이 스스로에게 내린 형벌이라는 성찰의 기운은 이들 모두에게 공통적이었다. 런던 시내의 극장을 통째로 빌려 '채식 영화제'를 열기도 했는데, 가축의 사육과 도축 과정에 대한 다큐멘터리부터 육식의 반문명성을 풍자하는 단편영화까지 다양한 '고급 프로파간다'가 쏟아졌다. 그 시절 나는 실연의 상처를 잊고 행복해졌다. 불고기를 먹고 부른 배를 두들기며 가디언과 BBC에 등장하는 좌우 논쟁을 즐겼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심지어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정책 담당자는 물론 과학자, 철학자 등이 모여 생명, 가축, 육식, 무역 등의 전반을 가로지르는 토론과 논전을 거듭하는 것을 보면서, 무엇보다 이런 공론을 정책적 결과로 결실 맺는 민주주의 과정을 보면서, 나는 즐거웠다. 영국인들은 결국 ‘타협과 조정’에 성공한 셈인데, 이후 소에게 동물성 사료를 먹이는 일을 금지시키고 각종 검역체계를 한층 강화하는 한편, 소의 뇌·척수 등 광우병 위험부위에 대한 식용을 일체 금지했다. 식용 가축의 '생태적 사육'과 '위생적 유통'을 위한 사회 체제를 갖추는데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부었다. 그 결과, 영국의 검역체계는 광우병에 대처하는 유럽연합 회원국 전체의 모범이 됐다. 유럽연합은 영국의 미친 소를 수입하는 대신 미친 소 대응책을 수입한 셈이다. 미국과 비교할 수 없는 유럽연합의 도덕적이고 과학적인 검역 체계가 이렇게 만들어졌다. 미국의 미친 소를 다루는 이명박 정부의 허술한 실용주의를 타박하는 것은 두말이 아까울 정도다. 정상적인 보수주의자라면 한국 닭 수입을 금지하는 미국에 대해 연일 비방을 퍼부어야 옳다. AI 조류독감 파동이란 철새에 병원균을 묻혀 반도로 날려 보내는 이웃 나라들의 음모이며, 조류독감에 걸린 닭도 충분히 익혀 먹으면 아무 탈 없으니, 날지도 못하는 닭을 조리하여 식용으로 포장해 수출하겠다는 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떼라도 써야 한다. 그 정도는 돼야 미국의 미친 소와 한국의 감기 닭을 비교급으로 놓고 무역 협상을 벌일 수 있다. 보수주의자들이 그 정도의 역할을 해줄 때, 진보주의자들은 한국의 조류독감과 미국의 광우병 사이에 놓인 ‘생명’의 문제를 짚어 보편적인 생태운동의 차원으로 옮겨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다시 한 번, 보수주의자들이 친미주의자가 되고 진보주의자들이 애국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보수 언론이 ‘미국 소가 한국 소보다 더 위험한 것은 아니다’라는 기묘한 비교급의 기사를 쓸 때, 그것은 분명 비겁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다만 그 안에는 진보주의자들이 주목해야 할 지점이 아주 없지 않다. 한국 소는 정말 안전한가? 한국인들이 소를 기르는 방식은 미국의 기업적 축산농에 비해 얼마나 더 생태적인가? 현대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생태적으로 기른 소를 먹는다는 일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가난한 사람은 동물사료를 먹은 수입소를 먹고 돈 많은 이는 생태적으로 기른 국산소를 먹는 일의 생명권적인 계급 불평등은 과연 시장의 조절기제에 맡겨 해결해도 괜찮은 문제인가?
안수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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