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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DNA에 나눔 새겨 봉사 ‘무한 복제’

등록 2008-04-07 19:24수정 2008-04-08 12:12

연세대 물리학과 박홍이(64) 교수
연세대 물리학과 박홍이(64) 교수
[향기 나는 사람들] ‘연세 나눔동네’ 이끄는 박홍이 교수

20여년 목·금 저녁과 토요일은 ‘남에게 쓰는 날’
운동도 10단 연구도 10단, 그의 하루시간은 25시
연세대 물리학과 박홍이(64) 교수는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두 가지 가르침을 늘 잊지 않고 삽니다. 선친은 그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나눔을 가슴에 안고 살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때부터 선친은 그에게 마당 청소를 시키고 용돈을 줬습니다. 그 가운데 10분의 1을 떼 다달이 고아원에 보냈다고 합니다.

“9살 때 가족 부양을 위해 품팔이를 시작한 뒤 자수성가한 아버님은 남을 돕는 일을 좋아했어요. 같은 반 친구 가운데 어려운 사람 이름을 적어오라고 해서 도와주셨고, 외출했다 불쌍한 사람에게 옷을 벗어주고 오시곤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배운 터라 나눔은 박 교수의 삶 속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아니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나눔은 그의 디앤에이(DNA)에 새겨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연세대 지질학과장을 지낸 유강민 교수와 함께 ‘연세 나눔동네’를 이끌고 있습니다. 이 모임은 20년 전 전도를 위해 한국에 와 농아장애인과 결혼해 살던 일본 여성이 어려움을 겪자 그를 돕기 위해 모금을 한 데서 시작됐습니다. 현재 ‘나눔동네’는 교직원, 졸업생, 재학생 등 250명의 회원이 다달이 1만원 이상씩을 내는 후원금으로 복지관, 나눔 단체, 불우한 개인 등 20곳에 후원금을 보내고 있습니다.

행려병자 염해주기 위해 염하는 방법까지 배워

박 교수는 2004년에는 자원봉사 모임 ‘즐거운 톰’(http://cafe.daum.net/tomnice)을 만들었습니다. 톰(T.O.M)은 Three ones movement의 약자로 ‘누군가 한 사람을 위해 일주일에 한 시간씩 봉사를 하자’는 뜻을 담은 말입니다. 그가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나눔 단체를 이끄는 일 외에 박 교수는 나눔 활동에도 열심입니다. 시흥시의 달동네 공부방 ‘초록세상’, 백혈병 및 소아암 환자 가족 모임 ‘한빛사랑나눔터’, 가양4종합복지관, 시몬의집 등 여러 곳에서 목욕 봉사, 영어 과외, 검도 지도 등으로 재능과 시간을 나눕니다. 행려병자를 염해줄 사람이 없다는 말에 염하는 방법까지 배웠을 정도로 나눔에 대한 그의 열정은 뜨겁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뒤 지난 20여 년의 세월 동안 그의 목·금요일 저녁과 토요일은 주로 다른 이들을 돕는 일로 채워졌습니다. 봉사활동 뿐이 아닙니다. 다달이 50만원 이상을 여러 곳에 후원하고, 주머니 동전은 눈에 띄는 모금함에 탈탈 털어 넣는 것이 그에겐 습관이 됐습니다.

목돈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그는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 돈을 모읍니다. 모금을 할 때는 원칙이 있습니다. 500만원을 모을 때면 그 금액의 5%를, 1000만원이면 10%를 자신이 먼저 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만보기에 2만보 이상이 찍힐 정도로 많이 걸어 다니고, 필요할 때면 자신의 승용차인 92년식 엑셀을 끌고 다닙니다.

박 교수는 남에게 무엇을 나눠주는 데 익숙합니다. 금방 산 책도 필요한 이가 있으면 그냥 줍니다. 그렇게 주다 보니 자신이 좋아하는 책 <긍정적 사고방식>을 28권이나 샀다고 합니다. 선물로 받은 고급 만년필도 여러 개 남한테 줬습니다. 한 제자가 이름까지 새겨 준 만년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홍천서 군 복무할 때도 야학 교사로 산골 아이들 가르쳐

그렇다고 그의 나눔이 여유로운 삶에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어릴 때 부산에서 손꼽히는 부잣집에서 자랐지만 그는 선친의 사업이 망해 친구가 마련해 준 300달러를 들고 미국 유학을 떠날 정도로 가난한 청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미국에서는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늘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습니다. 방학 때는 학비를 벌기 위해 하루 18시간씩 서서 일했습니다. 그때의 고된 노동은 그의 종아리에 하지정맥류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힘들던 고학생 시절에도 봉사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유학을 떠나기 전인 1966년 강원도 홍천 전방부대에서 군 복무를 할 때도 야학 교사로 산골 마을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군복 입은 선생님’ 시절의 사진은 지금도 그의 연구실 책장 위에 놓여 있습니다. “힘들 때면 저 사진을 보고 위안을 받곤 한다”고 합니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나눔과 봉사에 쓰지만 박 교수는 지난해 말 현재 영어로 쓴 학술진흥재단 등재 논문만 326편을 발표해 정년 때까지 300편을 쓰겠다는 목표를 훌쩍 넘겼습니다. 연구, 교수, 나눔, 봉사, 검도 등의 얘기를 듣다보면 그의 하루 시간은 24시간이 넘는 듯합니다. 비결은 하루 4시간 수면입니다. 힘은 검도와 참선에서 나옵니다.

나눔과 함께 그가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은 검도입니다. 그는 중학교 때 “공부는 잘하니 싸움을 배워보라”는 선친의 권유로 검을 잡았습니다. 51년 경력에 공인5단. “함께 시작한 사람들은 모두 8단이 됐다”며 아쉬워 하지만 공수도(4단)와 유도(초단)를 합하면 10단이나 됩니다. 여학생을 희롱하는 청년들을 혼쭐내 쫓아 보낼 정도의 ‘공력’을 자랑하는 무도인입니다. 그는 검도를 통해 겸손을 배웠다고 합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늘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성경 불경 등에서 얻은 지혜로 물리학회지에 만화 ‘깽패’ 연재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기니 박 교수는 남과 비교하거나 겨룰 생각이 없다고 합니다. 나눔과 봉사에는 거침이 없지만 자신이 하는 일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도, 굳이 숨기고자 애쓰는 마음도 없습니다. 그런 겸손은 다른 종교에 대한 존중으로도 이어집니다. 그는 ‘모든 종교는 하나의 산 정상에 이르는 여러 갈래의 길’이라는 간디의 말을 좋아합니다. 그래서인지 <노자>는 물론 <법구경>과 <아함경> 등 불교 경전에도 해박합니다. 그가 성경, 불경, 동양 사상 등에서 얻은 지혜는 오래 전 물리학회지에 연재한 만화 ‘깽패’의 주요 소재가 됐습니다. ‘깽패’는 그가 만든 말로 판을 깨뜨리고 새 판을 짜는 ‘선각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깽패’를 묶어 펴낸 만화책 <30원>(야스미디어)은 2006년 일본에서 <한국의 지혜>라는 제목으로 출간되기도 했습니다.

검도와 참선으로 몸과 마음을 다스렸지만 20년 넘게 남을 돌보는 일에만 몰두해서인지 지난해 말 건강하던 그의 몸도 탈이 났습니다. 췌장에 문제가 생겼다고 합니다. 큰 병은 아니지만 그는 석 달째 활동을 줄이고 몸을 추스르고 있습니다. 잠도 8시간으로 늘렸습니다.

아이한테 음악교습 멘토되려 아코디언 맹렬히 연습

그렇게 쉬는 와중에도 박 교수는 또 다른 나눔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멘토링 음악교습’입니다. 이를 위해 그는 아코디언을 맹렬히 연습하고 있습니다.

“아이 1명과 인연을 맺어 주마다 1~2시간 아코디언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출석률이 80%를 넘으면 아코디언을 선물로 주려구요. 그 다음부터 4년 동안은 멘토가 되어 아이가 원하는 활동을 함께 하는 겁니다. 연극도 보고 야구장에도 가는 거죠.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지식도 알려주게 될 겁니다. 그 아이에게 삶의 ‘롤 모델’이 되는 거지요. 죽은 뒤 하나님이 박홍이 너 뭐 했어라고 물으시면 저 아이에게 희망을 줬다고 답할 수 있지 않을까요?”

드럼, 섹소폰, 플루트 등 그의 제안에 따라 멘토링 음악교습을 하겠다며 악기 연습을 시작한 사람이 7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박 교수는 모임 이름도 지어놓았습니다. 카리타스. 라틴어로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염을 배우면서 큰 깨달음을 얻었어요. 부자나 가난뱅이나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백짓장 한 장 차이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살면 안되지요. 우리가 할 일은 그저 나누고 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글 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사진 곽윤섭 기자 kwak1027@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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