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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인형으로 인생 2막 연출 ‘죽어도 좋아’

등록 2008-03-12 10:48수정 2008-03-12 11:27

굿네이버스에서 위탁운영하는 방화2종합사회복지관 ‘좋은이웃 실버인형극단’ 소속 할머니들이 4일 서울 방화3동 복지관 강당에서 인형극 을 연습하고 있다. 김경호 기자
굿네이버스에서 위탁운영하는 방화2종합사회복지관 ‘좋은이웃 실버인형극단’ 소속 할머니들이 4일 서울 방화3동 복지관 강당에서 인형극 을 연습하고 있다. 김경호 기자
[향기 나는 사람들] ‘좋은이웃 실버인형극단’ 할머니들

나이 팔십 넘겨 웃고 운 인생사 ‘사회 환원’
“한 장면 400번씩 연습”…치매도 종양도 항복

고목나무에 꽃이 핀다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이웃 실버인형극단’의 할머니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모두들 나이 80이 넘으면 삶을 마무리할 때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 극단의 할머니들은 구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극단 단원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난 4일 오후 2시30분. 서울 방화동 방화2종합사회복지관 2층 강당에 할머니들이 한 두 분씩 모여들었습니다. 화요일과 목요일은 인형극을 연습하는 날입니다.

강당에 들어서는 할머니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밝습니다. 서로 손을 마주 잡고 인사를 나누고 얘기꽃을 피우는 모습이 여고 동창회 같은 느낌을 줍니다.

몸소 인형 만들고 쇠파이프로 무대 조립까지 거뜬히


극단 활동에 대한 생각을 물으니 모두들 할 말이 많은 듯 답변이 깁니다.

김남수(87) 할머니는 “늘그막에 이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싶어”라며 “죽을 때까지 활동하겠다”고 합니다. 박춘자(78) 할머니는 “인형극을 하면서 나를 괴롭히던 골다공증, 관절염, 갑상선 증세가 거의 사라졌어”라고 거듭니다. 두 분 모두 “인형극을 하게 된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좋은 일”이라고 거듭거듭 힘주어 말합니다.

“자 할머님들, 이제 연습 준비를 하셔야지요.” 극단을 이끄는 여영숙(56)씨의 말에 할머니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먼저 인형이 담긴 종이 상자를 끌어내다 놓습니다. 몸소 만든 인형들입니다. 알록달록 예쁜 색깔에 익살스런 표정까지, 인형을 만든 솜씨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한 할머니는 쇠파이프를 조립해 무대를 만듭니다. 보다 못해 도와드리려고 해도 “내가 전문가야”라고 하십니다. 받침대의 나사를 공구로 조이는 손놀림은 여느 젊은 기술자 못지 않습니다. 금새 연습장이 꾸며집니다.

이어 강당 스피커로 녹음한 음악과 대사가 흘러나오고 연습이 시작됐습니다. 오늘 연습하는 작품은 전래동화를 각색해 만든 <혹부리 영감>입니다.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신바람 이박사’로 알려진 가수의 노래입니다. 절로 어깨가 들썩여지는 음악과 함께 할머니들이 인형을 머리 위에 치켜들고 등장합니다. 물동이를 인 처녀, 혹부리 영감, 도깨비 인형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춥니다. 할머니들의 손놀림에 따라 인형은 손을 흔들고 가슴을 치며 몸을 이리저리 움직입니다. 도깨비가 혹부리 영감의 얼굴에 매달린 혹을 떼는 장면에선 실제로 혹이 떨어져 나갑니다. 할머니들이 인형을 다루는 솜씨는 웬만한 전문 인형극단에 버금갈 정도입니다.

2003년 창단 뒤 지금까지 무려 300회 이상 초청공연

‘좋은이웃 실버인형극단’은 굿네이버스에서 위탁운영하는 방화2동종합사회복지관에 소속된 극단입니다. 단원이 모두 할머니라고 얕보면 큰 오산입니다. ‘좋은이웃’은 2003년 창단 뒤 지금까지 무려 300회 이상 초청공연을 다녔습니다. 창단 첫 해에 춘천세계인형극제 아마추어 부문에 출전해 <혹부리영감>으로 연기상을 받았고, 2005년 일본에서 열린 이다페스티발에 초청받아 인기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2007년 춘천세계인형극제 때는 드디어 전문인형극단 부문에 초청을 받았지요. 74~87살의 1기 단원과 61~67세 2기 단원들로 이뤄진 할머니 극단이 이룬 성과라고 하기에는 믿기 힘들 정도입니다.

‘할머니 극단’의 창단은 우연히 이뤄졌습니다. 2003년 봄 복지관에서 문화여가 프로그램의 하나로 어르신들과 현대인형극단의 인형극 관람을 갔더랬습니다. 할머니들, 감동하셨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보다 더 재미있어 하는 모습을 보면서 담당 복지사는 할머니들에게 인형극단 창단을 제안했고 몇몇 분들이 참여의사를 밝혔습니다.


하지만 정작 인형극을 배울 데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더구나 할머니들에게 인형극을 가르치겠다고 선뜻 나서는 극단은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나선 사람이 현대인형극단의 여영숙(56) 전문아카데미원장이었습니다. 그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대사는 녹음을 통해 해결했지만 80살 전후의 할머니들에게 인형 조작은 꽤 까다롭고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 원장은 “한 장면을 400번 이상씩 연습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흘린 땀이 일궈낸 열매는 풍성했습니다.

“춘천세계인형극제 아마추어 부문에 나갔을 때 할머니들이 자신감을 얻었어요. 다른 팀들이 인형을 조작하는 게 자신들보다 못하다는 것을 봤기 때문이지요.”

춘천세계인형극제에서 ‘할머니 인형극단’의 솜씨를 본 이들을 중심으로 소문이 퍼져나가면서 이듬해에 공연 초청이 쏟아졌습니다. 1기 단원만으로 소화하기가 버거워 2004년 3월에 60대 할머니들을 중심으로 2기를 모집했습니다.

수익금은 소외 이웃에…문화-복지 결합 사회적 기업 꿈

인형극 공연은 할머니들의 삶에 큰 활력을 줬습니다. 최종례(81) 할머니는 “장애인 시설이나 고아원에 자주 가는데 우리 공연을 보고 좋아하는 분들을 보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공연활동은 할머니들의 건강에도 크게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유선금(81) 할머니는 2003년 위에서 종양이 발견됐지만 수술조차 미루고 공연에 참가했고 수술 뒤에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인형극이 그렇게 좋았다고 합니다. 그런 적극적인 활동 탓인지 할머니는 “이제는 다 나은 것 같다”고 자신감을 보일 정도로 건강합니다. 한 할머니는 몇 해 전 치매진단을 받았지만 지금까지 실수 한 번 없이 공연에서 자기 몫을 해내고 있다고 합니다.

‘문화 전문 노인자원봉사단’으로 자리매김한 ‘좋은이웃’은 공연수익금으로 소외된 이웃을 돕는 일을 합니다. 1기 단원 7명 가운데 4명이 수급권자로 정부 보조금을 받고 있지만 할머니들은 공연수익금 모두를 불우한 이웃을 돕는 데 쓰라고 내놓고 있습니다.

김일용 관장은 “할머니들이 극단 활동을 하면서 자존감이 생기고 삶의 보람을 크게 느끼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성과”라며 “실버극단을 문화와 복지를 결합한 사회적 기업으로 키워나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글 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관객보다 할머니들에게 초점…음악 동요 대신 뽕짝

고목에 꽃 피운 인형극 선구자 여영숙 원장

“내가 되레 배우는 게 더 많아 내 인생의 최고의 선물”

여영숙 현대인형극단 전문아카데미 원장. 김경호 기자
여영숙 현대인형극단 전문아카데미 원장. 김경호 기자
‘좋은이웃 실버인형극단’의 성공은 여영숙(56) 현대인형극단 전문아카데미원장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습니다. 그는 1978년 <한국방송>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부리부리 박사>의 주인공 역을 맡은 우리나라 인형극의 선구자이자 산증인입니다.

여씨의 구실은 극단에서 절대적입니다. 그는 2003년부터 지금까지 매주 두 차례 복지관을 찾아 할머니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연기지도는 물론 대본 집필과 인형제작까지 극단 운영 전체를 총괄하는 게 그의 일입니다.

여 원장이 ‘좋은이웃’에 도입한 인형극은 여느 인형극과 조금 다릅니다. 대개 인형극은 관객의 눈높이로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그는 실버인형극단의 인형극을 관객보다 단원인 할머니들에게 초점을 맞췄습니다. “할머니들의 행복이 먼저”라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런 그의 생각은 음악에서 도드라집니다. <혹부리영감>이나 <아버지와 아들>은 전래동화를 각색한 인형극입니다. 내용만으로 보면 어린이들에게 맞습니다. 하지만 그는 인형극에 동요 대신 할머니들이 좋아하는 뽕짝(트로트)을 많이 씁니다. 할머니들에게 익숙하고 또 신명나는 음악들이기 때문입니다.

여 원장과 ‘할머니 극단’의 인연은 우연히 시작됐습니다. 어느날 극단 홈페이지에 할머니들에게 인형극을 가르쳐달라는 글이 올라있었습니다. 현대인형극단의 인형극을 할머니들과 함께 본 방화2종합사회복지관의 사회복지사가 올린 글이었습니다. 그는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할머니들이 인형극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까.

“그때 남편이 적극 권했습니다. 제대로 된 봉사는 고목나무에 꽃이 피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영숙 원장과 ‘좋은이웃 실버인형극단’  할머니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김경호 기자
여영숙 원장과 ‘좋은이웃 실버인형극단’ 할머니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김경호 기자

용기를 내어 복지관을 찾았지만 우려는 현실이 됐습니다. 할머니들은 “죽을 날이 얼마남지 않았는데 우리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냐”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여 원장은 그들에게서 세상을 떠난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딸이 되어 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인형극 얘기를 꺼내지 않고 할머니들과 노래하고 춤추며 놀았습니다. 그렇게 석달이 지나자 할머니들이 마음을 열었습니다. 여 원장을 딸처럼 여기기 시작한 것이지요. 인형극 연습은 그때부터 시작됐습니다. 할머니들은 한 장면을 수백번씩 반복해서 연습해도 불평 한마디 없이 잘 따랐다고 합니다.

“할머니들과 함께 지내면서 시간의 소중함과 순간마다 우리가 얼마나 귀한 사람들을 만나는 지 알게 됐습니다. 가르친다고 하지만 제가 배우는 게 더 많은 것 같아요. 할머니들에게 인형극을 가르치기로 한 것이 제 인생에서 제일 잘한 결정입니다.”

글 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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