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통인동에 ‘길담서원’을 연 성공회대 박성준 겸임교수.권복기 기자
[향기 나는 사람들]
‘길담서원’ 연 박성준 교수 담소 나누고 함께 공부…때론 음악·영화도
양서는 기본, 지식 기르고 마음 닦는 모임터 17대 대통령 취임식으로 여의도가 떠들썩한 25일 서울 종로구 통인동 한 골목에서는 작은 책방 하나가 조용히 문을 열었습니다. 길담서원. 주인은 성공회대에서 평화학을 가르치는 박성준(68) 겸임교수입니다. 그는 비폭평화물결과 아름다운가게 공동대표를 맡고 있기도 합니다. 한명숙 전 총리의 남편이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아실 겁니다. 인문·사회과학과 문학·예술 관련 책 위주…박교수가 몸소 골라
“3년 전부터 책방을 내고 싶었습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미루고 미루다 오늘에야 꿈을 이뤘네요.” 길담서원은 독특한 책방입니다. 서점 대신 서원이라 쓴 데서 이곳이 책장사보다 공부에 더 많은 관심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길담서원의 주된 상품은 인문·사회과학과 문학, 예술 관련 책들입니다. 어린이 서가도 있습니다. 생명, 평화, 영성과 관련한 책들도 눈에 뜨입니다. 모두 박 교수가 몸소 골라 뽑았습니다. 참고서에 무협지까지 팔아도 문을 닫는 서점이 허다한 시대에 인문사회과학 서점이라. 박 교수는 “지금이야말로 공부가 필요할 때”라고 말했습니다. 총리의 남편으로 ‘무능한 좌파’라고 비판받은 정부를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예사롭지 않습니다. 영어 원서 강독 모임 꾸려…도자기 전시도 박 교수는 길담서원을 우리 조상들이 공부하던 서원처럼 운영할 생각입니다. 책도 팔야겠지만 책방을 지식함양과 정신수양을 원하는 이들의 모임터로 구실하도록 하겠다는 말입니다. 서점 한 쪽에 1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든 이유입니다. “우선 영어 원서를 강독하는 모임을 꾸릴 생각입니다. 영어 교육과 관련해 온통 생활영어만 강조합니다. 동양에서는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篇意自顯;백번을 읽으면 뜻은 저절로 드러난다)이라고 하잖아요. 원서로 된 좋은 책을 20번 정도 강독하면 귀와 입이 열릴 뿐 아니라 생각도 깊어집니다.”
박 교수는 길담서원을 문화 공간으로도 활용하려고 합니다. 먼저 한달에 한 번씩 음악을 함께 듣는 모임을 마련했습니다. 그날 만큼은 길담서원에서 포도주도 마실 수 있습니다. 영화감상을 위한 시설도 갖췄습니다. 박 교수는 “책방을 찾는 이들과 머리를 맞대고 다양한 문화행사를 함께 만들어갈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책방 안에는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공간도 있습니다. 인터넷 이용도 가능합니다. 책방이지만 책만 빼곡이 들어차 있지는 않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맨 먼저 눈에 띄는 전시대와 왼쪽 벽의 서가에는 책과 함께 예쁜 도자기들이 손님을 맞습니다. 한 도예가가 책과 함께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자고 제안했다고 합니다. 박 교수는 “도자기는 물론 책도 예술 작품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20평 남짓 작은 공간이지만 길담서원은 들어서는 순간 마음이 편해질 정도로 사람내음이 나고 여유가 느껴지는 곳입니다. 주인장이 고른 양서를 살 수 있고,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함께 모여 공부하며, 가끔씩 음악감상과 영화 관람도 가능하니까요. 인(仁)으로 통(通)하는 통인동에 자리 잡아
하지만 걱정이 됐습니다. 장사가 될까요. 좋은 뜻을 품고 출발한 일이 냉혹한 시장 속에서 싹을 틔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중단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박 교수는 “운영을 해봐야겠지만 손해를 볼 것 같지는 않다”고 자신있어 합니다. 큰 욕심이 없으니 유지 정도는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하나 봅니다. 구체적인 셈법을 말하는 대신 그는 길담서원이 자리한 통인동의 인문지리학적 특성을 강조합니다.
“서점이 있는 쪽 동네에서 세종대왕이 태어나셨고 길 건너편에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사시던 곳입니다. 그래서 이 동네 사람들은 자부심이 아주 강합니다. 그 분들이 서점이 생긴다고 하니까 무척 좋아하시더라구요.”
박 교수는 통인동이라는 동네 이름도 마음에 든다고 말했습니다. 통인(通仁)은 인왕산으로 통하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인(仁)으로 통(通)하는 곳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어질 인’은 학문하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인물인 공자가 강조한 덕목입니다. 인으로 통하는 동네, 공부하는 책방이 있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길담서원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은 절로 어진 마음이 길러지지 않을까요.
전쟁통에 홀로된 뒤 독학으로 대학 가…13년 옥살이 친구이자 스승
박 교수는 책방 이름에 얽힌 사연도 밝혔습니다. “우리 아이 이름과 친한 후배 아이 이름인 담을 따서 지었습니다. 불러보니 울림이 좋더군요.” 1940년생으로 2년 뒤 칠순을 맞는 박 교수가 책방을 낸 것은 어찌보면 운명과 같은 일입니다. 전쟁통에 부모와 헤어진 그는 독학으로 다른 이의 책을 베껴쓰면서 공부해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책은 그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학창시절 그렇게 갖고 싶던 책을 그는 감옥에서 많이 접하게 됐습니다. 1968년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돼 13년 넘게 옥살이를 할 때 책은 간난신고의 시절을 함께 헤쳐간 그의 친구이자 스승이었습니다. 책의 소중함을 삶으로 느낀 사람, 그가 바로 길담서원의 주인 박성준 교수입니다. 길담서원 주위에는 청와대와 정부종합청사는 물론 참여연대, 환경연합, 희망제작소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기관들이 많습니다. 모두 공부가 필요한 이들입니다. 그는 많은 이들이 통인동의 길담서원을 찾아 지혜와 어진 마음을 얻어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길담서원’ 연 박성준 교수 담소 나누고 함께 공부…때론 음악·영화도
양서는 기본, 지식 기르고 마음 닦는 모임터 17대 대통령 취임식으로 여의도가 떠들썩한 25일 서울 종로구 통인동 한 골목에서는 작은 책방 하나가 조용히 문을 열었습니다. 길담서원. 주인은 성공회대에서 평화학을 가르치는 박성준(68) 겸임교수입니다. 그는 비폭평화물결과 아름다운가게 공동대표를 맡고 있기도 합니다. 한명숙 전 총리의 남편이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아실 겁니다. 인문·사회과학과 문학·예술 관련 책 위주…박교수가 몸소 골라
“3년 전부터 책방을 내고 싶었습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미루고 미루다 오늘에야 꿈을 이뤘네요.” 길담서원은 독특한 책방입니다. 서점 대신 서원이라 쓴 데서 이곳이 책장사보다 공부에 더 많은 관심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길담서원의 주된 상품은 인문·사회과학과 문학, 예술 관련 책들입니다. 어린이 서가도 있습니다. 생명, 평화, 영성과 관련한 책들도 눈에 뜨입니다. 모두 박 교수가 몸소 골라 뽑았습니다. 참고서에 무협지까지 팔아도 문을 닫는 서점이 허다한 시대에 인문사회과학 서점이라. 박 교수는 “지금이야말로 공부가 필요할 때”라고 말했습니다. 총리의 남편으로 ‘무능한 좌파’라고 비판받은 정부를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예사롭지 않습니다. 영어 원서 강독 모임 꾸려…도자기 전시도 박 교수는 길담서원을 우리 조상들이 공부하던 서원처럼 운영할 생각입니다. 책도 팔야겠지만 책방을 지식함양과 정신수양을 원하는 이들의 모임터로 구실하도록 하겠다는 말입니다. 서점 한 쪽에 1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든 이유입니다. “우선 영어 원서를 강독하는 모임을 꾸릴 생각입니다. 영어 교육과 관련해 온통 생활영어만 강조합니다. 동양에서는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篇意自顯;백번을 읽으면 뜻은 저절로 드러난다)이라고 하잖아요. 원서로 된 좋은 책을 20번 정도 강독하면 귀와 입이 열릴 뿐 아니라 생각도 깊어집니다.”
길담서원에는 책과 함께 예쁜 도자기들도 전시돼 있다. 권복기 기자
박 교수는 길담서원을 문화 공간으로도 활용하려고 합니다. 먼저 한달에 한 번씩 음악을 함께 듣는 모임을 마련했습니다. 그날 만큼은 길담서원에서 포도주도 마실 수 있습니다. 영화감상을 위한 시설도 갖췄습니다. 박 교수는 “책방을 찾는 이들과 머리를 맞대고 다양한 문화행사를 함께 만들어갈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책방 안에는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공간도 있습니다. 인터넷 이용도 가능합니다. 책방이지만 책만 빼곡이 들어차 있지는 않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맨 먼저 눈에 띄는 전시대와 왼쪽 벽의 서가에는 책과 함께 예쁜 도자기들이 손님을 맞습니다. 한 도예가가 책과 함께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자고 제안했다고 합니다. 박 교수는 “도자기는 물론 책도 예술 작품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20평 남짓 작은 공간이지만 길담서원은 들어서는 순간 마음이 편해질 정도로 사람내음이 나고 여유가 느껴지는 곳입니다. 주인장이 고른 양서를 살 수 있고,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함께 모여 공부하며, 가끔씩 음악감상과 영화 관람도 가능하니까요. 인(仁)으로 통(通)하는 통인동에 자리 잡아
남편 박성준 교수가 연 길담서원에 나온 한명숙 전 총리. 권복기 기자
성공회대 박성준 겸임교수가 서울 종로구 통인동에 문을 연 길담서원. 권복기 기자
박 교수는 책방 이름에 얽힌 사연도 밝혔습니다. “우리 아이 이름과 친한 후배 아이 이름인 담을 따서 지었습니다. 불러보니 울림이 좋더군요.” 1940년생으로 2년 뒤 칠순을 맞는 박 교수가 책방을 낸 것은 어찌보면 운명과 같은 일입니다. 전쟁통에 부모와 헤어진 그는 독학으로 다른 이의 책을 베껴쓰면서 공부해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책은 그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학창시절 그렇게 갖고 싶던 책을 그는 감옥에서 많이 접하게 됐습니다. 1968년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돼 13년 넘게 옥살이를 할 때 책은 간난신고의 시절을 함께 헤쳐간 그의 친구이자 스승이었습니다. 책의 소중함을 삶으로 느낀 사람, 그가 바로 길담서원의 주인 박성준 교수입니다. 길담서원 주위에는 청와대와 정부종합청사는 물론 참여연대, 환경연합, 희망제작소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기관들이 많습니다. 모두 공부가 필요한 이들입니다. 그는 많은 이들이 통인동의 길담서원을 찾아 지혜와 어진 마음을 얻어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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