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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술 취한 아빠 피해 숨어든 삶 …14살 유라 “제가 엄마 지킬 거예요”

등록 2023-12-12 06:00수정 2023-12-12 16:59

한겨레 나눔꽃 캠페인
‘폭력’ 아빠 피해서 살고 있는 유라네
유라양이 태권도 동작을 취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유라양이 태권도 동작을 취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엄마는 제가 지킬 거예요.”

태권도복을 차려입은 유라(가명·14)양이 지난달 23일 전북 지역의 한 주택에서 한겨레와 만나 활짝 웃으며 말했다. 유라는 “아빠, 이제는 별로 무섭지 않다”고 말했다.

유라네 가족은 2년 전, 아빠의 가정폭력으로부터 도망치듯 이 집으로 왔다. 아빠는 술에 잔뜩 취한 날이면 엄마의 뺨을 때렸고 아이들이 잠든 방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그때마다 엄마는 남편의 폭력을 스스로 막아내면서 버텼다. 그러면서도 남편과는 결별하지 않기로 맹세했다. 아빠를 일찍 여읜 자신의 삶을 유라가 대물려 받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남편이 2021년 어느 날 술에 취해 “같이 죽자”며 아이들 앞에 흉기를 두고 행패를 부리자, 엄마는 그 다짐을 포기했다. 대신 아이들과 더 행복하게 살기로, 악착같이 살아남기로 바꿔 다짐했다.

필리핀에서 돈 벌고자 온 엄마, 유라 낳고선 가정폭력에

필리핀 태생인 유라 엄마(40)는 2006년 처음 한국에 왔다. 가난한 시골집의 10남매 중 둘째였던 엄마는 9살 때부터 설거지하는 일을 했다. 어렸을 때부터 쪼그려 앉아 일했던 탓에 왼쪽 갈비뼈가 어긋나 아직도 시린 날이 많다. 10년을 넘게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엄마가 선택한 것은 한국인 남편을 만나는 일이었다. “돈도 많이 준다고 하니, 한국에 가보는 게 어떻겠느냐”며 가족들도 엄마의 국제결혼을 장려했다. 엄마는 본인보다 15살이나 많은 남편과 해야 하는 이 결혼을 원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더 나은 생활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듬해인 2007년 유라 언니를 낳을 때까지만 해도 엄마는 타지 생활에 나름 만족했다. “제가 어려서 그랬는지 처음엔 많이 예뻐했죠….” 엄마는 씁쓸해하며 말했다.

유라가 막 돌이 지났을 때부터 남편의 태도는 달라졌다. 일을 마치고 들어온 그에게 남편은 ‘어디 다녀왔는지’, ‘누구랑 있었는지’를 계속해서 추궁했다. 술은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었다. 질문은 “어떤 놈이랑 있었냐”로 바뀌었고,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한 남편은 소리를 질렀다. 조금만 늦으면 무참히 때렸다. 남편은 술에 취한 날이 많아지면서 농사일도 제대로 하지 않아 부모와도 갈등을 빚었다. 버는 돈은 족족 도박과 술에 썼다.

폭력 때문에 인근 경찰서의 ‘단골’이라 할 정도였다.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았던 막내아들은 엄마를 지켜준다며 “경찰관이 되겠다”고 했다.

“아빠가 워낙 엄마를 함부로 대해서 집에 경찰도 많이 왔어요.” 유라는 그런 아빠의 폭력을 지켜봤다. 엄마가 없을 때면 아빠의 손은 유라나 언니, 동생에게 향하기도 했다. 방문을 잠그는 일은 일상이었고 밖에도 잘 나가지 않았다. 또래 아이들은 조금 다른 유라의 생김새를 두고 놀렸다. 주눅 든 어깨는 학교에서도 펴지 못했다. 태어나서 살던 곳을 한번도 떠나지 못했던 유라였기에 마땅히 벗어날 곳도 없었다.

태권도 다니면서 활발해진 유라…“두려울 게 없어요”

그런 유라에게 태권도장은 유일한 탈출구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인 2021년 태권도장을 다녔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공부보단 운동을 좋아했던 유라는 어려운 형편인 걸 알면서도 욕심을 냈다. 엄마는 그런 유라의 결정에 선뜻 응해줬다. “저도 어렸을 땐 운동을 잘했어요. 필리핀에서 투포환도 했고 공수도(가라테)도 했어요. 형편이 좋지 않아서 저는 일찍 그만뒀는데, 유라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엄마는 “아이들이 자기 하고 싶은 것 하면서 행복했으면 좋겠다. 제가 하지 못하고, 이루지 못했던 것들 아이들은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23일 전북에서 만난 유라(14·가명)양이 집 근처 태권도장에서 발차기를 선보이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지난달 23일 전북에서 만난 유라(14·가명)양이 집 근처 태권도장에서 발차기를 선보이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아이들이 자기 하고 싶은 것 하면서 행복했으면 좋겠다. 제가 하지 못하고, 이루지 못했던 것들 아이들은 했으면 한다”

엄마의 지지 덕인지 유라는 재능을 꽃피웠다. 1년이나 걸리는 단증 심사도 5~6개월이면 딸 정도였다. 내년이면 2단을 딸 자격이 된다. 유라는 “엄마 닮아서 운동도 잘하는 것 같다”고 웃으며 말했다. 또래보다 키가 작은 유라는 겨루기 대신 품새(태권도 연속 동작 기술)를 선택했다. “품새 중에 손날을 딱 펴는 동작이 있어요. 처음엔 되게 어려웠거든요. 근데 며칠씩 하다 보니 어느 날 딱 되는 거예요.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어려운 동작들이 하루하루 연습한 뒤에 달라지는 모습은 유라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아직 잘하려면 멀었다”라던 유라는 시와 협회가 주관하는 태권도대회에 나가 상장과 상패도 받았다. 유라는 스스로 품새를 연습하면서 본인은 늘 멀었다고 생각한다. “잘한다고 생각하면 연습을 게을리하는 것 같아요. 힘들어도 앉아 있지 않으려고 해요.” 유라는 태권도장이 쉬는 일요일만 제외하면 늘 도장에 가 연습했다.

태권도에서 재능을 보이자, 유라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자신감이 생겼다. 두려울 것이 없었기에 유라는 중학교에 진학한 뒤로 친구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친구들과 잘 얘기도 못 했고 낯을 많이 가렸는데 이제는 제 의사도 잘 표현해요. 한번 사는 건데 주눅 들 필요 없겠더라고요.” 이제 유라에게 낯섦은 사라졌다.

남편과 떨어져 행복하지만, 생계는 막막

유라는 아빠에게서의 독립, 태권도란 안식처를 통해 달라졌지만, 엄마는 아직도 아빠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애초 이혼을 해준다던 남편은 “돈을 내놓거나 아니면 소송하라”며 합의해주지 않았다. 이혼 소송에 시간과 돈을 쓸 수 없던 엄마는 아직도 가족관계증명서에 남편 이름을 지우지 못했다. 이는 유라네 가족의 경제적 어려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엄마가 공장을 다니며 버는 200만원은 네 식구가 쓰기엔 모자라는 돈이다. 부족한 생활비는 지인에게서 빌려 충당했다. 정식 이혼이 되지 않아 시에서 지원하는 ‘한부모 가정’ 지원금도 받을 수 없었다. 유라네는 차상위계층이지만, 별도로 받는 지원금은 없다. 교육비가 모자랄 때면 주말에 복숭아 농장을 나가지만, 일이 많지 않아 수입이 불확실하다. 엄마는 병원은 고사하고 자신이 먹는 음식도 줄여가며 생활을 꾸리고 있다. “밥은 괜찮아요. 아이들 웃으면서 사는 것만 봐도 괜찮습니다.” 엄마는 말했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절대요.”

유라양이 태권도로 받은 상장과 메달.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유라양이 태권도로 받은 상장과 메달.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최근 시부모는 ‘재결합’ 조건으로 엄마에게 거액을 제시했다. 그러나 엄마는 이제 막 안정된 아이들이 남편 때문에 다시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그랬다. 엄마는 “이제 돈 때문에 다시 불행한 선택을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아이들도 그런 엄마를 지지했다. 엄마도 행복해야 한다, 다시는 그런 사람과 만나지 말라고.

그러나 생계에 대한 걱정에 엄마는 마냥 웃을 순 없었다. 이런 사정을 아는 듯 유라 언니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취업에 나설 예정이지만, 엄마는 딸의 미래를 망치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다. 유라는 벌써 고등학생이 되면 스스로 돈을 벌겠다고 했다.

남편과 떨어진 뒤로 엄마는 아이들과 집에서 멀지 않은 부안으로 바다를 보러 다녀왔다. 그들의 첫 여행이었다. 이 여행은 가장 기억나는 엄마와의 추억이면서 우리 가족의 행복한 기억이었다고 유라는 회상했다. “아빠 없는 지금 이 순간이 정말 행복해요. 걱정할 것이 없어요”라고 유라는 말했다. 이들이 아빠로부터 도망쳐 온 집의 한곳엔 네 식구가 한복을 입고 찍은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엄마는 인터뷰 내내 밝은 표정을 보기 어려웠지만, 그 사진을 보면서는 밝게 웃었다.

이날 인터뷰가 끝나자 유라는 “밀린 빨래를 해야 한다”며 일어났다. “우리는 각자 역할이 분담돼 있어요. 그래야 엄마랑 시간을 더 보낼 수 있거든요.”

곽진산 기자 kjs@hani.co.kr

캠페인에 참여하시려면

유라네 가족에게 도움을 주시려는 분은 계좌로 후원금을 보내주시면 됩니다. (우리은행 285-999966-18-004 예금주: 월드비전) 네이버 해피빈에서도 후원에 참여하실 수 있으며, 다른 방식으로 도움을 원하시는 분은 월드비전 대표번호(02-2078-7000)로 문의해주세요. 모금 참여 후, 월드비전으로 연락 주시면 기부금 영수증을 발행받으실 수 있습니다. 목표 모금액은 1천만원으로, 유라 남매의 교육비와 태권도 관련 용품 구입비, 생계비 등을 지원하는 데 사용될 예정입니다. 월드비전은 유라가 목표했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후원금을 투명하게 전달하고 보고하겠습니다. 목표 금액인 1천만원 이상 모금될 경우 유라 가정의 뜻에 따라 도움이 필요한 또 다른 가정에 지원됩니다.

보도 이후

한겨레와 초록우산이 함께한 ‘2023 나눔꽃 캠페인’을 통해 ‘세 차례 심정지를 겪은 아이’ 운재(가명)의 사연(한겨레 11월13일치 14면)을 전해드렸습니다. 운재의 사연이 소개된 뒤 845분께서 “운재야 힘내”, “희망은 있다”, “운재에게 치유의 기적이”라는 따뜻한 응원 메시지와 함께 4684만5399원(12월7일 기준)의 정성을 모아 재단에 전해주셨습니다. 초록우산은 “소중한 후원금은 운재의 입원 및 검사비, 호흡과 운동작업 등 재활치료비 및 치료부대경비로 활용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전해왔습니다. 운재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귀중한 나눔을 결심하고 실천해주신 모든 후원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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