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은 우리 사회의 밑바탕이고, 헌법의 제도적 수호자는 헌법재판소다. 헌재는 법률이나 공권력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할 때(위헌법률심판, 헌법소원) 이를 막아서는 최후의 보루이며, 위법한 권력자를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 막강한 권한(탄핵심판)을 지녔다. 그렇게 헌재는 1988년 설립 이후 35년 동안 수많은 결정을 통해 헌법의 영토를 다져왔다. 하지만 빅데이터로 지난 20여년간 헌재 결정을 분석한 결과, 헌법재판관들이 사회적 합의의 토대를 확장시키기 위해 의견을 활발히 교류하기보다 자신들의 추천·지명권을 가진 진영에 따라 갈라져 군집화하는 경향이 점차 강화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1일 취임한 윤석열 정부의 첫 헌법재판소장인 이종석 소장은 재판관 시절 진보그룹과 동떨어진 채 보수그룹의 허브 역할을 했던 것으로 분석된 바 있다. 이견 그룹 간 조율 역할을 적극 수행했던 이전 헌재 소장들의 역할을 해낼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한겨레는 법률 인공지능 스타트업 엘박스에 의뢰해 최근 22년(2001~2023년) 동안 재판관 7인 이상이 참석한 전원합의체 결정 중 한명이라도 소수의견을 개진한 결정문 989건을 분석했다. 재판관 만장일치로 결정난 사안은 제외했다.
재판관 5명 이상이 변경되면 헌재 구성이 질적으로 달라졌다고 보고, 2006년·2012년·2018년을 기준 삼아 분석 기간을 ①2001~2005년 ②2007~2011년 ③2013~2017년 ④2019~2023년 등 4개 구간으로 나눴다. 어떤 결정에서든 다수·소수의견을 함께 내면 ‘의견이 일치했다’고 봤고, 이렇게 계산된 ‘의견 일치율’이 65%를 넘으면 서로 ‘연결됐다’고 간주했다.
①·②구간에서는 진보·보수 양쪽과 연결되는 재판관이 여럿 등장했다. ‘중도 지대’에 다수 재판관이 분포했다는 뜻이다. ③구간에서는 그 수가 줄었고 재판관들은 세 갈래로 나뉘었다. 특정 갈래에 속한 재판관이 다른 갈래 재판관과 연결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④구간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 강화돼 진보·보수 두 그룹으로 재판관들이 확연히 나뉘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참여연대 공동대표)는 “과거와 비교해 보수-진보 틀에 따라 (헌재 내) 진영 싸움이 계속되는 모습”이라며 “중간에서 중재하는 중도 세력이 사라진 탓에 협상의 여지가 줄어들었다”고 분석했다.
헌법재판소 전경.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헌재 소장의 역할도 엿볼 수 있다. ①구간에서는 윤영철 소장이 중재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분석 시기 동안 함께 근무한 재판관 13명 중 8명과 두루 의견을 함께했다. 전효숙·김효종 재판관도 보수 색채가 강했지만, 분야에 따라 진보적 그룹과 의견을 함께하며 중도 지대를 형성했다. 이 시기에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호주제 헌법불합치, 신행정수도 이전 위헌 결정 등이 있었다.
②구간 때도 이강국 소장이 재임 기간이 겹친 재판관 10명 중 6명과 두루 의견을 함께하며 합의의 토대를 마련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희옥 재판관은 이동흡·이공현·목영준 재판관과 보수그룹을 형성했지만, 진보 성향의 송두환 재판관(현 국가인권위원장)과 67%라는 비교적 높은 의견 일치율을 보이며 중도 지대를 형성했다. 보수 성향 민형기 재판관도 재판관 11명 중 7명과 의견을 함께하는 등 중도 지대를 형성하는 데 힘을 보탰다. 당시에는 친일재산 몰수 특별법 합헌
등의 결정이 내려졌다.
③구간 때에는 헌재 역사상 최초로 검사 출신인 박한철 재판관이 소장을 지냈다. 그는 이전 소장들과 달리 검사 출신 안창호 재판관, 보수 성향 서기석 재판관(현 한국방송 이사장) 등 단 2명과만 주로 연결됐다. 이때부터 진영별로 재판관들의 의견이 뭉치는 정도가 강화됐는데, 소장의 역할과 연결지어 해석할 수 있는 지점이다.
조용호·서기석 재판관이 보수의 축을, 김이수 재판관이 진보의 축을 이뤘다. 다만 박한철 소장 후임인 이진성 소장은 애초 보수 성향으로 알려졌던 것과 달리 진보적인 소수의견을 많이 냈고, 이정미 재판관도 보수 성향을 띠긴 했지만 사안에 따라 진보 의견을 내 중도 지대 형성에 기여했다. 강일원 재판관과 이선애 재판관도 중도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통합진보당 위헌정당 해산 등 정치적으로 중요한 결정들이 있었다.
④구간에서 전임 유남석 소장은 진보그룹 4명 및 보수그룹 2명과 연결됐다. 진보적인 의견을 주로 내면서도 중재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 외 유의미한 중도 지대는 관찰되지 않았다. 이 구간 헌재는 이종석 재판관(신임 헌재 소장)을 중심으로 한 보수그룹과 문형배 재판관을 중심으로 한 진보그룹으로 뚜렷하게 나뉘었다.
한 헌법연구관 출신 변호사는 “진보와 보수가 극명하게 갈리면서 양 진영 간 의견을 통합하면서 유의미한 결론에 도달하는 경우가 추세적으로 적어진 것으로 보인다”며 “재판관들의 이념적 성향이 극명하게 구분되자 재판관들이 합의 노력 없이 각자의 의견만 확인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 시기에는 낙태죄 위헌, 검찰 수사권 축소 등에 관한 권한쟁의심판 등의 결정이 있었다.
2018년 10월부터 재판관으로 활동하다 지난 1일 헌재 소장으로 취임한 이종석 소장은 취임사에서 헌재 양극화를 반성하며 이를 해결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저는 5년 전 이 자리에서 정치적·이념적 갈등이 점차 심화하는 우리 사회를 통합시키는 데 기여하겠다고 다짐했다”면서도 “많은 점에서 저의 다짐이 국민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소장의 막중함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지혜와 도움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재판관 시절 보수그룹 재판관들과만 연결됐던 그를 두고 소장이 된 이상 재판관들 간 의견을 교환하는 ‘평의’를 통합적으로 운영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당부가 나온다.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앞선 윤영철, 이강국 소장은 반대쪽 재판관을 많이 설득했지만, 박한철 소장 시기부터 합의를 이끄는 소장의 리더십이 약해졌다”며 “평의를 주재하는 소장이 중재자 역할을 하며 상대 쪽을 설득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헌재 파견 경험이 있는 한 법조인은 “국론 분열이 그대로 헌재의 분열로 이어지고 있다”며 “헌재가 갈등을 더 극단화하는 것이 아닌 국민통합에 기여하는 합의와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정혜민 기자
jh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