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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전시엔 재판 없이 죽일 수도” 김광동 주장…정부의 첫 판단은?

등록 2023-10-29 11:55수정 2023-11-01 10:10

‘김광동 발언’ 계기 된 영천사건 31일 전체위 심의
경찰기록을 근거로 6명은 진실규명 불능처리 예상
지난 10일 서울 중구 남산스퀘어빌딩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앞에서 열린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회 집회에 참석했던 김만덕 영천유족회장이 호소문을 읽고 있다.  고경태 기자
지난 10일 서울 중구 남산스퀘어빌딩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앞에서 열린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회 집회에 참석했던 김만덕 영천유족회장이 호소문을 읽고 있다. 고경태 기자
“전시에는 재판 없이도 죽일 수 있다”는 문제적 발언이 공식적인 정부의 판단으로 정당화될 것인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오는 31일 오후 전체위원회를 열고 ‘영천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영천 사건)의 결론을 내린다.

앞서 1소위원회 위원장인 이옥남 상임위원(여당 추천)은 대상자 21명 중 15명에 대해선 국가폭력 희생자라고 인정했지만, 나머지 6명에 대해선 ‘재판 없이 처형된 건 맞지만, 희생 경위를 확인할 근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적대 세력에 부역했을 수 있으므로 순수한 희생자로 인정하기 힘들다’는 취지다. 전체위가 소위 결론을 확정하면, 한국전쟁기에 적법 절차 없이 진행된 학살을 정당화하는 첫 결정이 된다.

2009년 1기 진실화해위는 같은 사건으로 희생된 민간인 20명에 대해 ‘재판 없이 처형됐다’는 점을 들어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자로 인정했다.

영천 사건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경북 영천의 보도연맹원·예비검속자 600여명이 국민보도연맹원 또는 전선 접경지역 거주민으로 인민군에게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군경에게 살해된 사건이다.

영천 사건 진실규명 신청자 중 ‘진실규명 불능’ 대상이 된 6명은 영천경찰서가 각각 1979년·1981년에 작성한 대공인적위해자조사표(위해자조사표)와 신원기록편람에 ‘10·1 사건에 가담 살인, 방화 약탈 등 좌익활동하다가 처형된 자’ 등으로 적혀 있다. ‘10·1 사건’은 미군정기인 1946년 10월 대구와 경북 일대에서 식량공출(정부에 일정량을 의무 판매)을 강압 시행한 이유로 경찰과 민간인이 충돌한 사건이다.(아래 설명문 참조)

31일 열릴 전체위에서 합의가 안 될 경우 표결도 예상된다. 진실화해위는 김 위원장 포함 여당 쪽 위원이 5명이고, 야당 쪽은 3명이다. 야당 추천 위원들은 “해당 자료는 가해 기관이라 할 수 있는 경찰이 작성했다. 여기 적힌 희생자들의 행위를 구체적으로 입증할 공적 자료는 없다”는 입장이다.

실제 위해자조사표엔 1950년 당시 9살이었던 정립분에 대해 ‘10·1 당시 요인암살 방화 등 행위한 자. 50.7.1 처형’으로 기록된 것이 드러나 자료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된 바 있다.

17일 오후 진실화해위 조사국 관계자가 대회의실에서 진행되는 제64차 전체위원회 모습을 티브이로 보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17일 오후 진실화해위 조사국 관계자가 대회의실에서 진행되는 제64차 전체위원회 모습을 티브이로 보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현재 진실화해위에서는 영천 사건 외에도 ‘진도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이 유사한 논란과 진통을 겪고 있다. 진도 사건의 경우 24일 1소위에서 논의했으나 전체위 상정이 보류됐다. 이밖에도 경남·북 지역은 경찰 기록으로 희생자들을 부역자로 몰아갈 가능성이 있는 사건이 상당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광동 위원장은 지난 13일 국정감사, 17일 전체위 등에서 줄곧 “전시에는 민간인에 대한 즉결처분이 가능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왔다. 지난 26일 국정감사장에서는 그동안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즉결처분은 군법회의를 포함한다”고 말을 바꾸기도 했다. 지난 23일엔 진실화해위에 몸담았던 위원과 조사관, 연구자·시민 등 3460명이 성명을 내어 김 위원장의 즉결처분 발언을 비판한 바 있다.

※ 10·1 사건과 영천

10월사건은 당시 미군정이 친일관리를 계속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공출을 강압적으로 시행하는 것 등에 불만을 가진 민간인들과 좌익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선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46년 9월 하순에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일어나자 이에 이어 10월 1~2일 사이 대구에서 주민 봉기의 형태로 발생해 1946년 12월 중순까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경북의 경우 1946년 10월2일에서 6일 사이 22개 군에서 주민 봉기가 발생했는데 영천은 봉기가 가장 격렬했던 곳 중 하나이다. 당시 영천지역 봉기가 격렬했던 원인은 영천이 논농사지역으로 농민들의 지주소작관계에 대한 갈등, 귀환동포 유입 등에 따른 급격한 인구 증가와 미군정의 식량공출정책 등으로 발생한 민생문제, 경제적인 문제로 인한 갈등이 심했으며 사회운동이 활발했던 것을 들 수 있다.

영천의 봉기는 10월5일 대구에 주둔하던 미군과 충남경찰부대 등 지원경찰이 투입되어 진압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영천에서는 12월8일까지 600여 명이 경찰에 검거되었으며 재판에 회부된 사람 가운데 9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또한 이 무렵부터 이듬해인 1947년 봄까지 3~4개월 동안 화북면 등지에서 충남경찰부대의 진압과정에 민간인이 다수 살해되었으며 경찰의 진압과는 별도로 이 지역에 들어온 서북청년단원과 현지 우익단체 청년단원들이 봉기 가담자를 색출하기 위해 산간지역 마을 주민들을 집단폭행하는 사건도 자주 있었다.(‘진실화해위 ‘경북 영천 국민보도연맹 사건’ 보고서·2009에서 인용)

이에 따라 1기 진실화해위는 ‘영천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사건과 별개로 1948년 8월15일 정부 수립 후부터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 전까지 군경 토벌과정에 경북 영천에서 구석이 등 11명을 포함한 민간인 200여명이 경찰, 국군, 서북청년단과 호림부대에게 적법절차 없이 희생된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린 바 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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