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경찰서 ‘대공인적위해자조사표’(전 5권, 1979) 중 5-1 ‘처형자 명부’ 컴퓨터 입력자료에 실린 경북 영천군 화산면 당지동 ‘이쁜이’ 정립분에 대한 기록. 9살짜리를 ’요인 암살·방화를 행위한 자. 50.7.10 처형’으로 기록해 놓았다. 1기 진실화해위 ‘경북 영천 국민보도연맹 사건’ 보고서
“1941년생인 아홉살 ‘이쁜이’는 암살·방화범이었다. 그리하여 1950년 7월10일 처형되었다.”
경북 영천경찰서가 1979년 작성한 ‘대공인적위해자조사표’ 처형자 명부에 실린 경북 영천군 화산면 당지동 정립분(鄭粒分) 관련 기록만 보자면 그렇다. ‘립분’은 남자 아이로 집에서 부르던 이름 ‘이쁜이’의 한자 이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 상세한 경찰기록을 보면, 립분은 ‘10·1 당시 요인 암살·방화 등 행위한 자’로 나온다. ‘10·1’은 미 군정기인 1946년 10월1일과 2일 사이 대구에서 경찰과 민간인이 충돌한 사건(이른바 ‘대구항쟁’)을 일컫는다. 1946년 당시 ‘이쁜이’는 다섯살이었다.
최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서는 전남 진도 부역혐의 희생사건과 경북 영천 국민보도연맹사건의 진실규명을 둘러싸고 ‘부역자 낙인찍기’ 논란이 뜨겁다.
지난 19일 오후 열린 제1소위원회(위원장 이옥남 상임위원) 회의에서는 두 지역의 조사보고서가 안건으로 올라왔으나 여야 추천 위원들간에 의견이 모아지지 않았다. 야당 추천 오동석 위원은 20일 한겨레에 “(10월10일 다음 소위원회에서) 일부 안건을 재논의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경찰 사찰기록에 암살대원·살인 등으로 처형사유가 적힌 일부 희생자들의 진실규명 건이 19일 소위원회 안건 상정 과정에서는 배제됐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이옥남 상임위원이 내세운 경찰 기록 중 하나가 바로 ‘이쁜이’가 등장하는 영천경찰서의 ‘대공인적위해자조사표’ 처형자 명부다.
‘이쁜이’ 사례는 현대사 연구자인 김상숙 성공회대 연구교수가 2016년 출간한 ‘10월항쟁, 1946년 10월 대구 봉인된 시간속으로’(돌베개) 맨 끝에 있는 ‘남겨진 이야기: 전쟁 후의 또 다른 전쟁’편에 수록돼 있다. 김 교수는 1기 진실화해위(2005~2010)에서 경북 영천 국민보도연맹사건을 직접 조사한 조사관 출신이기도 하다.
그는 책에 쓴 글에서 “진실화해위 조사 과정에서 영천경찰서 자료를 제4대 국회 자료 및 진술인들의 진술 자료와 비교하며 신뢰도를 확인했다. 그 결과 희생자의 신원에 대한 기록은 다른 자료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상세했으며 처형 날짜와 처형 사유에 대한 기록은 부정확하다”고 했다.
김 교수는 19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도 “경찰이 명부를 작성을 하는 과정에서 자기들이 죽인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처형 사유를 여러 가지로 허위 기재를 해놓은 것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경우가 ‘이쁜이’ 정립분이었다”고 말했다.
영천경찰서 ‘대공인적위해자조사표’와 진도경찰서의 ‘대공’, 서산경찰서 ‘신원기록심사보고’ 등의 경찰 자료는 1기 진실화해위 집단희생조사국 자료조사팀이 2007년부터 전국의 각 경찰서 문서창고 등을 찾아 수집한 것이다. 이는 1960년대 초부터 1980년대까지 만들어져 민간인 희생자 유가족들을 감시·통제하거나 연좌제 적용에 활용하기 위해 썼던 자료들이다.
김 교수는 책에서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처형자 명부, 실종자 명부, 월북자 명부, 요시찰인 명부, 보도연맹원 명부 등의 경찰서 작성 자료는 희생자 신원과 가해 기관을 공식적으로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국가 문서지만 가해당사자인 기관에서 작성한 것이고 사건이 발생하고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작성했기 때문에 기록의 신뢰성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고 썼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1소위원회 위원장인 이옥남 상임위원이 지난 6월21일 진실화해위 제57차 전체위원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김 교수가 1기 진실화해위 조사관 시절 현지조사와 함께 제4대 국회보고서의 양민 피살자 신고서 등을 종합 검토한 결과에 따르면, ‘이쁜이’ 정립분은 1950년 9월4일에서 16일 사이 국군에게 살해당했다. 군대에 갔던 형 정동택(당시23살)이 탈영했다는 이유로 정동택의 소속 부대 대원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영천군 화산면 당지리 가장골 양지골짜기 등에서 정립분과 그의 부모 형제 및 마을 사람들을 수십명(참고인들이 진술한 숫자는 14명) 학살했다는 것이다. 1946년 10월 항쟁과 무관한데도 경찰 자료에는 ‘10·1 사건 관련 처형자로 기록돼 있으며 날짜도 1950년 7월10일로 잘못 적혀 있다.
1기 진실화해위에서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 일어난 영천 국민보도연맹사건 희생자로 확인된 사람 239명 중 116명은 영천경찰서 ‘대공인적위해자조사표’와 ‘신원기록편람’등의 자료에 ‘10·1 사건 당시 암살·방화 등을 하다가 처형된 자’ 또는 ‘10·1 사건 가담, 주민납치, 공공시설 파괴하다가 처형된 자’등으로 기록돼 있다고 한다. 이중에는 정립분과 같이 1950년 기준으로 9~19살(1946년 10·1사건 기준 5~15살)인 미성년자 5명도 포함돼 있다. 이는 사실상 허위기재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김 교수는 “전시 국민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재판 등 적법절차 없이 학살된 사람이 대부분인 다른 처형자 101명의 처형사유도 진위를 확인하기 어렵다”고 썼다.
김 교수는 한겨레에 “국가보안법이라든가 (미 군정) 포고령 위반이라든가 하는 실정법으로 희생자들을 구속한 것도 아니고 6·25때 무차별 학살을 해놓고 그렇게 처형 사유를 적어놓은 것이다. 1기 진실화해위에서는 사형선고를 받았다거나 하는 재판기록이 없다면 다 불법적인 처형 희생자라고 보고 진실규명을 했었는데 2기 위원회에서는 이러한 역사적 과정들을 다 무시하고 그냥 ‘살인’ ‘암살’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이유로 부역자로 몰아붙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부역자를 세심하게 살피겠다”는 방침을 이미 밝힌 바 있는 이옥남 상임위원은 별다른 논리 없이 경찰 사찰기록을 맹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옥남 상임위원은 최근 월간조선(2023년 10월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해자(군경)가 만든 자료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 공적인 자료를 믿지 않으면 무엇을 믿어야 할까요.(중략) 처형 사실은 믿어도 처형 사유나 시기는 믿지 못하겠다는 건 자기모순 아닌가요. 당시 만든 공적 자료는 기본적으로 신뢰할 필요가 있어요.”
진도경찰서와 영천경찰서 기록에 나오는 ‘암살대원’, ‘살인’등의 처형사유는 아무런 근거가 제시돼 있지 않다. 신문자료나 수사기록, 재판기록은 물론 단 한 줄의 부연설명도 없다. 그럼에도 공적 자료를 신뢰하는 이옥남 상임위원의 눈에는 아홉살 ‘이쁜이’가 빨갱이 부역자로 보일까.
※‘부역자’는 통상 1950년 인민군 점령기에 이들에게 협조한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진실화해위에서 ‘부역 혐의자’는 즉결처분 당한 희생자를, ‘부역자’는 법원 재판을 통해 부역 혐의가 확정된 주민을 가리켜왔다. 부역자 처리지침을 만든다는 건 당시 재판도 받지 못하고 즉결처분 당한 ‘부역 혐의자’ 중 누가 ‘부역자’인지 진실화해위가 판정해 진실규명 여부부터 재검토하겠다는 뜻으로 여겨져 반발을 사왔다.
또한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좌익 전향자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 정부가 만든 관변단체다. 군경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에 동조할 것이라는 막연한 우려 속에 이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했다. 19일 1소위에서 결론을 내지 못한 영천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경우 부역혐의 희생이 아닌 사건 중에서 처음으로 희생자를 부역자로 판단하는 사례가 될지 주목된다.
고경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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