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나는 앉아 있었다.

얼마 동안 앉아있었냐면, 아주 오래 앉아 있었다. 날짜로 말해야 한다면, 2만6440일 이상 앉아있었다. 시간으로 환산하면, 63만4560시간 이상 앉아 있었다. 분으로 쪼개 말하자면, 3807만3600분 이상 앉아있었다. 22억8441만6000초 이상 앉아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 시간이 얼마나 숨 막혔는지, 의식할 수 없었다. 쪼그려 앉은 채로 숨이 끊어졌고, 머리 위로 흙이 덮였지만, 자세를 고치지 못했다. (이상은 본헌터 제1화 도입부 재인용) ▶본헌터 몰아보기 https://hani.com/u/ODExNQ

2023년 3월, 나에게 기적이 찾아왔다. 나를 덮고 있던 흙을 털고, 비로소 쪼그려앉은 자세에서 해방됐다. 나의 모든 뼈들은 분리되었고, 산 밖으로 나와 이동했다. 안식을 찾지는 못했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추석이 다가왔다. 추석이라…. 나는 땅에 묻히기 직전, 불안한 마음으로 보내던 73년 전 추석의 시간들을 음미했다. 그러고보니 추석이 지난 뒤 곧장 산에 끌려가 묻힌 것 같다. 나는 이승의 거리를 지나가는 이 아무나 붙잡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퀴즈를 내고 싶어졌다.

A4-5 : 저기, 잠깐만요.

MZ-23 : 깜짝이야. 누구세요?

A4-5 : 아, 저는 A4-5라고 합니다. 저 모르시죠?

MZ-23 : 몰라요. 근데……………사람이세요?

A4-5 : 사람…이었죠. 한참을 땅 속에 묻혀있다가 올해 3월에 도움 주신 분들 덕분에 세상에 나왔어요.

MZ-23 : 그러고보니 어디서 본듯.

A4-5 : 맞아요. 신문과 방송에 많이 나왔어요. 충남 아산시 배방읍 공수리 산110 성재산 기슭에서 출토되었지요. A4-5는 제가 나온 지점을 가리키는 식별번호입니다. 현재 한겨레에서 연재중인 ‘본헌터’의 주인공 중 한 명이구요.

MZ-23 : 그렇군요. 저는 MZ-23이에요. 2023년 MZ세대 중 한 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근데 왜 저 불렀어요?

A4-5 : 퀴즈 내려고요.

MZ-23 : 넹?

A4-5 : 추석맞이 퀴즈 내러 왔어요. 본헌터 추석맞이 역사전쟁 퀴즈.

MZ-23 : 역사전쟁이요?

A4-5 : 홍범도 장군 알죠. 얼마전 육군사관학교에서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한다고 해서 말들이 많았죠. 요즘 윤석열 대통령이 역사 이념전쟁 벌이잖아요. 홍범도 장군까지 공산주의 전체세력으로 규정해 몰아내려 하다니.

MZ-23 : 무슨 그런 거창한 얘기를. 저는요. 어른들이 막 가르치려고 하는 거 싫어해요.

A4-5 : 가르칠 생각은 없어요. 그냥 호소하는 거예요. 관심 좀 가져달라고요. 홍범도 장군 뿐만 아니라 저희 같은 이름없는 희생자들까지 이상하게 몰아가는 분위기라서요.

MZ-23 : 그래서 뭔 퀴즈를 내겠다는 거죠?

A4-5 : 저에 대해서, 저를 죽인 시대에 대해서죠.

MZ-23 : 음…그럼 한번 내보시죠.

A4-5 : 그러니까 지금은 윤석열이잖아요. 그때는 누구였죠?

MZ-23 : 제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데 라)는 아닙니다. 누굴 바보로 아나.

A4-5 : 그럼…가)나)다) 중에서 누구?

MZ-23 : 가) 박정희? 아닌가? 음. 그때 김일성이 남침했다고 배웠어요. 우리 엄마아빠는 무조건 김일성이 나쁜놈이라고 했어요.

A4-5 :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켰다면 우리 국민을 보호해야 할 책임을 진 사람은 누구죠? 그래서 대통령을 묻는 거예요. 혹시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단체 알아요?

MZ-23 : 국민…보도…연맹? 요새로 치면 시민기자연합회인가요?

MZ-23 : 보도블럭? 장난해요? 그래도 헷갈리네. 혹시 이 연맹에 속한 회원이 몇명이었어요?

A4-5 : 1950년 초에 집계된 회원수가 30만명이 넘었다고 해요. 보도연맹, 아주 유명한 단체였는데 모르는구나.

MZ-23 : 나)는 확실히 아닌 것 같네요. 선물 준다고 30만명을 불러모을 필요까지.

A4-5 : 그럼 뭐 같아요?

MZ-23 : 라)도 아닌듯. 설마 죽이려고. 국가가 살인마도 아니고, 30만명을 죽이려고 불러요? 상식적으로는 가)번이 유력.

A4-5 : 그렇군요. 역사는 늘 상식을 배반하죠.

MZ-23 : 혹시 보도연맹원이셨어요?

A4-5 : 아니에요. 이야기만 들었어요. 보도연맹원들을 부르고 두 달 정도 지나 인천상륙작전이 있었죠. 인천상륙작전 알아요?

MZ-23 : 알아요. 그거 영화도 있는데. 한겨레에서 만화도 연재했었고요.

A4-5 :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왔다가 밀려나고, 나중에는 다 북한으로 퇴각했죠.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서울이 수복되면서죠.

MZ-23 : 어렵네요.

A4-5 : 날짜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그게 추석 이틀 뒤였어요. 그러고선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됩니다.

MZ-23 : 다 처음 듣는 말인데요. 역도는 스포츠경기 아닌가요? 음 정답은 부역자?

A4-5 : 오, 맞았어요. 역도는 여기서 役徒(役:부릴 역, 徒:무리 도)지요. 부역자나 역도는 다 같은 뜻입니다. 사실 가)나)다)라) 비슷한 뜻으로 쓰였어요. 유독 요즘 들어 이 말이 많이 회자돼요. 저랑 비슷한 처지에 있다가 죽은 사람들에게 그 딱지를 붙이고 싶은가봐요.

MZ-23 : 혹시 인민군에 협조했어요? 부역했어요?

A4-5 : 글쎄요. 했으면 어쩔래요?

MZ-23 : 음. 죄에 상응하는 처벌?

A4-5 : 맞아요. 처벌받아야 한다면 받아야죠. ‘비상사태하의범죄처벌에관한특별조치령’은 문제가 많았지만, 그렇게라도 절차를 밟았다면 덜 억울했을 지도 모르죠.

MZ-23 : 그렇구나. 부역자셨구나.

A4-5 : 그렇지는 않아요. 저도 몰라요. 의심을 받았거나 꼬투리를 잡혔을 수는 있겠죠.

MZ-23 : 에이, 부역한 거 같은데….

A4-5 : 우리나라는 왕정인가요, 신정인가요, 민주공화국인가요.

MZ-23 : 민주공화국일 걸요 ㅎㅎ

A4-5 : 그럼 법에 따라 해야죠.

MZ-23 : 아무튼 뭔가 안 좋은 일을 당하신 거죠? 부역 의심자로? 부역 혐의자로?

MZ-23 : 어렵네요. 어려워요.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쭤봐도 돼요?

A4-5 : 그냥 산에 끌려갔어요. 처형됐어요. 땅에 묻혔어요. 아무도 저를 꺼내주지 않았어요. 그러다 73년만인 올해 땅에서 나왔다니깐요.

MZ-23 : 정말요? 와 대박이다. 그런 경우가 세상에 어딨어요?

A4-5 :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 안 하는 사람도 많아요.

MZ-23 : 무서운 퀴즈네요. 어떻게 여기서 하나를 골라요?

A4-5 : 두 사람 중 한 사람만 죽이고 한 사람은 살린다고 가정해봐요. 가령 한 살 젖먹이와 30대 임산부 중.

MZ-23 : 안할래요.

A4-5 : 여러 가족들 전체 죽이려다가 10살 아래 남자 한 명씩만 봐준 경우는 있어요. 그렇다고 라)가 정답은 아니지만.

MZ-23 : 이제 그만 해요.

A4-5 : 거의 다 끝났어요. 제가 몇개로 보여요?

MZ-23 : 네?

MZ-23 : 어려워요. 일일이 다 세봐야 하나요?

A4-5 : 이 숫자가 제목인 영화도 있어요. 한 번 꼭 보세요. 뼈 이야기를 계속 해볼까요?

MZ-23 : 나)는 아닌 거 같아요. 갈비뼈는 툭하면 부러진다고 들었어요.

A4-5 : 저도 얼마전 제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가장 두꺼운 뼈를 잘라내 보관하는 절차를 거쳤어요. 혹시 제 가족이 저를 찾을 경우 상봉할 수도 있지요.

MZ-23 : 아 그렇구나. 근데 요새 어디 계세요?

A4-5 : 집에 있죠. 잠시 머무는 곳이에요.

MZ-23 : 답 알면, 언제 한 번 놀러갈까요?

A4-5 : 아니 뭐 그럴 필요까지. 그냥 관심 가져주기만 해도 눈물나게 고마울 거 같아요.

MZ-23 : 문제가 너무 어려웠어요. 그 뭐더라… 보도연맹, 태어나 처음 들었어요.

A4-5 : 그렇군요. 보도연맹은 유명한 사건인데. 과거 없는 현재는 없대요. 추석 잘 보내요 안녕.

고경태 기자 k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