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 대법원장이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퇴임식에서 퇴임사를 하고 있다. 2017년 9월 25일 취임한 김 대법원장은 6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다. 연합뉴스
김명수 대법원장의 6년(2017년 9월25일~2023년 9월24일)은 그 어느 때보다 대법관 인적 구성이 다양했던 시기로 손꼽힌다. 여성 대법관이 역대 최대인 4명(김소영·박정화·민유숙·노정희 대법관)에 이르렀고, 법원이나 검찰을 거치지 않은 순수 재야 출신 변호사(김선수 대법관)가 처음으로 대법관이 되기도 했다. ‘김명수 대법원’의 구성 다양화는 활발한 의견 개진과 전향적 판결로 이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 전원합의체 116건 중 45건 판례 뒤집어
법원행정처는 24일 ‘김명수 대법원’에서 이뤄진 전원합의체 선고 총 116건 가운데 판례 변경은 45건, 최초로 새로운 법리를 제시한 선고는 39건이라고 밝혔다. 대법원장과 대법관 전원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는 소부에서 대법관들 의견이 일치하지 않거나 종전 대법원 판례를 변경하고 새로운 판단 기준을 제시할 필요가 있을 때 열린다.
김명수 대법원은 과거사 문제에 전향적 판결을 종종 내놓았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대일 배상청구권’을 인정한 판결이 대표적이다. 대법원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들이 신일철주금(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재상고심에서 피해자 승소를 확정하며, 강제동원 피해자가 일본 기업에 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길을 처음으로 열었다.
유신정권 때의 긴급조치 9호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 배상책임도 처음 인정했다. ‘대통령의 긴급조치가 고도의 정치적 행위여서 정부에 배상책임이 없다’던 2015년 대법원 판례를 뒤집은 것이다. 미군 기지촌 ‘위안부’ 여성에 대한 정부의 배상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한 대법원 소부 판결도 있었다.
여성 대법관 비율이 가장 높았던 시기인 만큼 여성 인권에 기여하는 판결도 적지 않았다. ‘제사 주재 우선권’을 장남에게 주었던 15년 전 성차별적 판례를 뒤집었던 판결이 대표적이다. 대법원은 유족 간 합의가 없는 경우 고인과 가장 가까운 직계비속 가운데 남성과 여성, 적자와 서자에 상관없이 최연장자가 제사주재자를 맡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미성년자가 동의해 성관계를 가졌더라도 성인의 거짓말에 넘어가 성관계를 결심한 것이라면 해당 성인을 ‘위계에 의한 간음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판례를 내놓아 위계에 의한 간음죄의 성립범위를 대폭 넓히기도 했고, 피해자가 저항하기 곤란한 정도의 폭행과 협박이 있어야만 강제추행죄를 인정했던 40년 전 판례도 뒤집었다.
성소수자 인권에 기여한 판결도 눈에 띈다. 군부대 밖에서 합의 아래 성관계를 한 남성 군인들을 처벌할 수 없다고 한 판결이 대표적이다. 대법원은 미성년 자녀를 둔 트랜스젠더에게 성별정정을 허가하며 11년 전 대법원 판례를 깨기도 했다.
노동 분야에서 의미 있는 판결도 많았다. 대법원은 단결권의 핵심이 ‘국가로부터의 자유’에 있다며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 대한 정부의 법외노조 통보를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박근혜 정부의 노조 탄압을 7년 만에 바로잡은 판결이다. 학습지 교사 등 특수고용노동자에게 단결권 등 노동3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판결도 있었다.
노동자 과반의 동의 없이 취업규칙을 불리하게 변경했더라도 ‘사회 통념상 합리성’이 있다면 적법하다던 종전 대법원 판례도 뒤집었다. ‘사회 통념상 합리성’ 개념이 모호해 법적 불안정성이 크다는 취지다. 불법 파업의 책임을 따질 때는 조합원 개인의 역할과 손해 기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소부 판결도 있었다. 파업 노동자에 대한 기업의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역할을 해 사실상 ‘노란봉투법’ 입법과 유사한 효과를 낼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 사법부 관성 못 넘어…장애인 이동권 부정 판결도
한편 사법부의 보수적 관성을 뛰어넘지 못한 판결도 적지 않았다. 특히 장애인 당사자가 버스사업자와 국가·지방자치단체 등을 상대로 제기한 장애인 시외이동권 보장을 위한 차별 구제소송에서 대법원이 장애인의 이동권을 부정한 판결은 교통약자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줬다.
1·2심은 국가 책임을 부인하되 버스회사에는 휠체어 승강 설비를 제공하라고 판결했지만 대법원은 “장애인이 모든 노선버스에 탑승할 구체적·현실적 개연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원고 패소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진정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처벌하지 않는다’며 14년 만에 판례를 바꾼 대법원이 그 의미를 퇴색시키는 후속 판결을 내놓기도 했다. ‘평화주의가 아닌 비권위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진정한 양심이 아니다’라는 취지로 비종교적 병역거부자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등 양심의 내용을 심사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사법농단이라는 초유의 사태 속에서 출발한 김명수 대법원은 사법농단 판사들에게 잇따라 면죄부를 줘 ‘제 식구 감싸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일선 재판에 개입한 혐의로 기소됐던 판사들에게 잇따라 무죄를 확정하며, ‘남의 재판에 개입할 권한이 없으니 남용할 권한도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유승익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실행위원(한동대 교수)은 “의미 있는 전향적 판결들도 분명 있었지만 권력이나 자본에 대한 핵심적인 사안은 피해 간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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