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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퇴행적 감수성’ 대법원장 후보 이균용의 운명은?

등록 2023-09-23 07:00수정 2023-09-23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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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이혼한 뒤 덴마크의 한 작은 고향 마을에 돌아온 루카스(마스 미켈센)는 유치원 교사다. 그는 새 연인을 만나고 조금씩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는 듯싶다가 갑자기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한다. 죽마고우의 다섯살 딸 클라라가 “루카스가 성기를 보여주고, 내게 하트 모양 펜던트도 줬어요”라고 성추행을 했다는 취지의 말을 하면서다.

클라라의 이야기는 거짓말이었다. 매일 싸우기만 하는 부모와 달리 자기를 따뜻하게 돌봐주는 루카스가 좋았던 클라라가 루카스에게 ‘입뽀뽀’를 했지만, 루카스가 “입뽀뽀는 엄마 아빠에게만 해야 해”라며 주의를 주자 클라라가 뿔이 나면서 한 거짓말.

거짓말에서 비롯된 소문은 순식간에 마을 전체에 퍼져 나가고, 루카스는 졸지에 아동 성추행 범죄자로 낙인찍힌다. 루카스는 경찰 조사까지 받아야 했지만, 피해자 진술 증언에서 성추행 장소로 루카스의 집 지하실이 언급되면서 루카스의 누명은 벗겨진다. 그의 집엔 지하실이 없었다. 하지만 이웃들의 혐오는 그에게 이미 ‘유죄’를 선고한 뒤였다. 클라라와 그의 부모와 화해하고 평화를 되찾았지만 사슴 사냥에 나섰다가 알 수 없는 사람이 겨눈 총에 맞을 뻔하는 아찔한 경험까지 한다. 2012년 개봉된 덴마크 영화 ‘더 헌트’(토마스 빈테르베르 감독)의 줄거리다.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는 대전고법원장 재직 시절 이 영화를 보고 주변에 언급하면서 “아동학대·성범죄 피해자의 증언을 완전히 믿기 어렵다”는 취지의 발언을 수차례 했다고 한다. 이 후보자는 아마 ‘아동학대와 성범죄 피해자의 진술은 과장될 수 있는 만큼 사실관계를 치밀하게 따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실제로 그는 사건의 기록을 꼼꼼하게 살피고 판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영화만큼은 한참 잘못 봤다. ‘더 헌트’는 피해자 진술증거의 신빙성을 따지는 법정 영화가 아니다. 영화에서 사법체계는 제대로 작동했고, 루카스에게 누명을 씌우지 않았다.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선입견에 사로잡힌 대중이 형사사법기관의 무혐의 판단 뒤에도 성범죄자라는 낙인을 찍는 ‘마녀사냥’의 가혹함을 영화는 이야기하고 있다.

이 후보자는 성범죄 전담부(서울고법 형사8부) 재판장으로 있던 2020년 8월~2021년 2월, 10건 중 4건꼴로 감형하거나 유죄를 무죄로 뒤바꾸는 판결을 했다. ‘13살 여학생을 강제로 추행하고 상해를 입힌 남성’ ‘성관계를 거부하는 헤어진 여자친구를 때리고 성폭행한 21살 남성’ ‘아픈 아내의 복부를 발로 밟아 숨지게 한 남편’ 등의 형벌을 무더기로 깎아줬다. 수도권 법원에 근무하는 한 판사는 “이 후보자는 법리에 근거한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있다고 생각할 테지만, 사실 그는 피해자에게 조금도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법조계 안팎에선 이 후보자가 대법원장이 되면 성범죄 가해자에게 온정적인 그의 관점에 부합하는 판결이 쏟아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이 후보자 인사청문회를 진행한 국회 인사청문특별위원회는 지난 21일 인사청문 경과 보고서를 채택했다. 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부적격’ 의견을 적었다. 이 후보자 임명동의안 국회 표결은 일러도 10월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시대에 역행하는 감수성을 보여주는 대법원장 후보자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이재호 법조팀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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