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어린이보호구역 내 인도를 걷다 만취차량에 치여 숨진 배승아(9) 양의 유골함이 11일 오후 대전 서구 추모공원에 봉안됐다. 연합뉴스
대전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에서 초등학생 배승아(9)양이 만취한 60대가 몰던 차량에 치이는 사고를 당한 날은 지난 8일, 토요일이었습니다. 주말 오후를 맞아 친구들과 함께 생활용품점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사 들고 늘 다니던 인도를 걸어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습니다. 최근 3년간 어린이보호구역에서 발생한 어린이 교통사고 10건 가운데 1건이 이처럼 주말에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실은 지난 9일 ‘국민제안 2차 정책화 과제’ 15건을 발표하면서 온종일 시속 30㎞로 달려야 하는 스쿨존에 시간대별 탄력적 속도제한 운영 등을 검토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갑작스럽게 나온 이야기가 아닙니다. 넉달 전 법제처는 요일별·시간대별 어린이보호구역 규제 완화 권고를, 1년 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인수위)는 심야시간대 어린이보호구역 제한속도를 상향하는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그 배경에는 ‘
스쿨존 형벌이 과하다’는 일부 운전자들과
‘주말과 심야시간대는 스쿨존 내 사고가 적다→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윤석열 정부의 일관된 사고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어린이보호구역 내 음주운전 사고로 배승아(9) 양이 사망한 가운데 9일 오전 대전 서구 둔산동 사고 현장에 배양을 추모하기 위해 시민들이 놓고 간 국화꽃과 음료수, 장난감, 편지 등이 놓여있다. 배양의 친구들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편지에는 ‘천국에서 잘 지내 그리고 거기 가서도 행복해야 해'라는 글이 적혀있다. 연합뉴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12일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법제처는 지난해 12월14일 ‘2022년 제2회 국가행정법제위원회 전체회의’를 열고 관련 부처에 어린이보호구역 규제를 요일별·시간대별로 달리 적용하는 등 완화해야 한다고 제도 개선을 권고하기로 했습니다.
법제처가 규제 완화를 권고한 근거는 지난해 실시한 어린이보호구역 제도 입법영향분석 보고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보고서를 보면,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어린이 교통사고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요일은 2019년 금요일(122건), 2020년 화요일(85건), 2021년 금요일(108건) 등이었습니다. 전체 사고 가운데 주말 사고 비중은 2019년 13%, 2020년 15%, 2021년 12%였습니다. 보고서는 “이러한 비중은 2019년 이전과 큰 차이가 없다”며 “주중보다는 낮은 비율이지만 전체 사건의 12~15% 정도는 휴일(주말)에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러한 분석 결과를 두고 법제처는 “
주중에 견줘 주말 사고 비율이 낮”으므로 요일에 따라 어린이보호구역 규제 완화를 검토해야 한다고 밝힌 겁니다.
이같은 법제처의 권고를 두고 ‘민식이법’(스쿨존에서 어린이를 상해·사망에 이르게 한 경우 가중처벌)을 대표발의했던 강훈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당시 “(운전자의) 불편을 합리적이고 차분하게 돌아보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그러는 동안 아이들의 목소리가 법전까지 가닿기는 참 어렵다”며 “중요한 것은 어린이의 생명과 안전보호라는 입법 목적”이라며 비판한 바 있습니다. 이후 12월28일 법제처는 경찰청에 요일별 규제 완화 방안은 빼고 심야시간대(자정부터 새벽 6시까지)에 어린이보호구역을 탄력 적용할 수 있는지 검토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지난 8일 대전 서구 둔산동 문정네거리에서 음주운전으로 배승아(9)양을 차로 치어 숨지게 한 ㅂ(66)씨가 10일 오후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대전 둔산경찰서에서 나와 호송 차량에 오르고 있다. 대전지법 윤지숙 영장 전담 부장판사는 이날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어린이보호구역 치사 등 혐의를 받는 ㅂ씨에 대해 구속 전 피의자심문을 한 뒤 “도주의 우려가 있다”며 구속영장을 발부했다.최예린 기자 floye@hani.co.kr
어린이보호구역 규제 완화 움직임은 법제처 권고가 처음이 아닙니다. 지난해 4월5일 윤석열 정부 인수위는 기자회견을 열어 ‘교통안전 확보와 함께 국민 편의를 위한 속도제한 탄력 운영’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해당 방안에는 “간선도로 어린이보호구역의 경우 어린이가 다니지 않는 심야시간대에는 제한속도를 현행 시속 30㎞에서 40㎞나 50㎞로 올리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고 “2017년부터 최근 5년 동안 어린이보호구역 내 어린이 교통사고 2478건 가운데
오후 8시에서 다음날 오전 8시 사이에 발생한 사고는 모두 117건(4.7%)인데, 사망자는 없었다”는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대전 어린이보호구역 내 인도를 걷다 만취차량에 치여 숨진 배승아(9)양의 생전 모습. 지난 10일 오전 <시비에스>(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유튜브 화면 갈무리.
헌법재판소(헌재)는 지난 2월23일 ‘민식이법’(특정범죄가중처벌법 제5조의13) 헌법소원에서 재판관 8대1로 합헌 결정을 내리며
“운전자가 높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운행 방식을 제한받는 데 따른 불이익보다 어린이가 교통사고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안전하고 건강한 생활을 영위하도록 해서 얻게 되는 공익이 더 크다”고 강조했습니다. ‘민식이법’은 어린이보호구역에서 만 12살 미만 어린이를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하면 징역 3년 이상 또는 무기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다치게 할 경우에는 1년 이상 15년 이하 징역이나 500만원 이상 3천만원 이하 벌금을 부과할 수 있습니다. 헌법소원을 낸 이들은 ‘민식이법’이 운전자에게 ‘과도한 형벌을 부과하고 있다’는 취지로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헌재 판결문을 보면, 우리나라 14살 이하 어린이 인구 10만명 당 보행 중 사망자 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여섯번째(2019년 기준)입니다. 헌재는 “아직도 (우리나라는) 보행자보다 차량을 우선시하는 후진적인 차량 중심의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어린이보호구역을 설치하고
엄격한 제한속도 준수의무와 안전운전의무를 부과하여 그 위반자를 엄하게 처벌하는 것은 어린이에 대한 교통사고 예방과 보호를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고 밝혔습니다.
승아양의 오빠 역시 “가해 운전자에 대한 엄벌을 원한다”고 언론에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떨까요. 대법원 양형위원회 운영지원단 자료를 보면, 2020년 1월부터 2022년 6월까지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어린이가 죽거나 다친 교통사고의 1심(단일 범죄) 선고 165건에서 실형이 선고된 건 6건(3.7%)에 그쳤습니다.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